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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1/06/28  김지영
강화 선원사지(禪源寺址)의 진실 무엇이 문제인가?

이틀 기초 조사하고 선원사지로 추정 후 확정

역사 왜곡의 주체와 묵시적 동조 기관은 책임져야 함

 

   이른바 선원사지, 사적 제259호로 지정되어 팔만대장경조판성지선원사로 불리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692-5 일원 현재 주지 성원 스님이 선원사를 운영하고 있다.

 

 

고려시대 江都 선원사(禪源寺)

   선원사(禪源寺)는 고려시대 몽고와 항쟁하기 위해 개경에서 강화(江都)로 도읍을 옮긴지 131245(고종32) 당시 최고 권력자 최우(崔瑀)가 대몽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하여 건립한 사찰이며 전남 승주의 송광사와 함께 전국2대 사찰 중의 한 곳이다.

 

  초대 주지로는 진명국사(眞明國師), 2대 원오국사(圓吾國師), 3대 자오국사(慈梧國師), 4대 원명국사(圓明國師) 등 고려시대 큰 스님께서 주지로 임명되었던 사찰이었다.

 

   선원사는 최우의 원찰(願刹)이었고 충렬왕(고려 제25대왕 원종의 맏아들, 강화태생)이 한때 궁전(1290.12~1292.1)으로 사용하였기도 하였으며 국보 제32, UNESCO지정 세계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147년간 보관하였던 곳이다.

 

   당시 선원사에 보관 중이던 팔만대장경은 1398(태조7)년에 한양 지천사(支天寺)로 옮겨졌다가 합천 해인사(海印寺)로 옮겨져 현재 보존되고 있다.

 

선원사지 문화재 지정 과오와 문제의 발단

   현 선원사지는 19771129일 선원면 지산리 692-1을 사적 제259호 선원사지로 지정하였는데 이것은 옛 강화도지 문헌에 나타난 선원사는 선원면 선행리 현 충렬사 문전 일대지(선행리 371번지 일원)라고 한 역사 기술과 다르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민, 문화재청, 조계종, 인천광역시, 강화군은 선원사의 역사적 진실을 잘못 인식하게 될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되었다.

 

현 선원사지가 문화재로 지정된 경위

1976215KBS가 강화도 개항 100주년 기념행사 방영

197631일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강화도 방문 후 팔만대장경 판각터인 선원사지 발굴관련 동국대학교 학술조사 지시

 321~22일 학술조사단의 기초조사

322일 지금의 선원면 지산리 신니동 가궐터(1264, 고종 원종5년에 풍수지리학자 백승현의 말에 의해 창건 된 임금이 다니는 사찰) 자리를  선원사지로 추정하고, 328일 제1 합동조사로 확정

1119~21일 실측조사(3일간)

197711월 강화도 학술조사보고서 발간

선원면 지산리 신니동을 사적 제259(선원사터)로 지정 두 차례의 답사와 한 차례의 실측 조사만으로 현재의 위치를 선원사터로 확정하고 국가유적으로 지정(2004년 국정감사 정책자료집3, 국회의원 강혜숙)

19961029~19973241차 발굴

1998615~19981272차 발굴

199975~19991143차 발굴

20001113~20016284차 발굴을 하였으나 발굴 결과는 선원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일 뿐이었다.

 

강화문화원의 선원사지 진실판단

  사적 제259호로 지정된 선원면 지산리의 선원사는 향토역사와 관련한 여러 기록의 정황으로 보아 그 지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선원사지는 선행리 현 충렬사 일대라는 주장

  고두섭 향토사학자,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조사팀, 이호경 향토사가의 질의에 이병도 박사의 답변, 2007년 강화문화지, 2004년 국정감사 정책자료집3(강혜숙 국회의원), 역대 지리지, 고려시대의 기록, 구전되어 오는 설과 사례, 현 선행리 충렬사 부근 유물발견 등에서 보여지는 선원사지의 진실을 정리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선원사'府南八里'로 나와 있다는 기록, 조선시대의 지도에 나타난 길을 따라 실제로 측정해 본 결과 강화도 남문부터 지산리 가궐터까지는 11(4.4km)이고 선행리 충렬사까지는 8(3.2km)로 나왔다.

 

   ‘강도지(17세기 편찬)에 충렬사의 거리는 '府南七里'라고 했고 현재 남문에서 강화 남산을 에워싼 도로를 따라 충렬사까지의 거리를 계산한 결과 2.8km7리가 맞았다.(당시 1리는 0.4km로 계산되었음)

 

   ‘강도부지"禪源寺으로 고쳐 禪源里로 하였다." 라는 구절도 선원사가 선원면에 있었다는 사실만을 알려 주고 있을 뿐이며 오히려 선원리(禪源里)는 충렬사 인근의 선행리(仙杏里)가 선원사지였다는 점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또한 현 사적지로 지정된 선원사지의 지역명 지산리는 신지동(神智洞) ''와 남산동(南山洞)''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마을 이름으로 지역명으로 보다도 신빙성이 없다.

 

   ‘고려사에 따르면 지산리 신지동은 가궐이 있었고, 대불정오성도량(大佛頂五星道量)의 법회가 열린 곳이라고 한다.

 

   ‘강도지에서 충렬사(忠烈寺)"부의 남문에서 7리이며 선원면 수능암리(水陵庵里)에 있다. 1637년 정축년에 순직한 김상용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라고 기술되어 있다. 따라서강도지에서 선원사조에 선원사의 위치를 '府南八里'라 하였고 충열사조에 충렬사의 위치를 '府南七里'라 했음은 충렬사를 지나 선원사를 뒤편에 위치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여지도서의 강화도 충렬사조에서 "충렬사는 선원면에 있으며 부에서 7리 떨어져 있다. 정축년(1637)에 순절한 김상용 등을 제사 지내기 위한 사당이다." 라고 기술되어 있고, 1783년에 편찬된 강화부지"충렬사는 선원리에 있고 김상용의 구택이었다."라고 한데서 선원사는 폐사된 이후 장원서과원이 되었고 나중 이곳에 김상용의 거처를 마련하고 仙源으로  자호를 삼고 그가 1637년 강화 남문에서 순절하자 이를 기려 그의 구택에 충렬사를 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선원사터는 현재 충렬사 인근이라는 말이된다.

 

   충렬사가 있는 부락은 부락 이름이 술감(수륙암에서 변화된 지명)이며 구옥들은 거의 모든 집에서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고 댓돌을 쉽게 볼 수 있으며 무수한 와편(瓦片)과 고려자기 조각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충렬사 앞에 거주하는 김택성씨 마당에는 선원사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느티나무의 후손인 느티나무가 아직도 대를 이어 자리하고 있다.

 

   김택성씨 집 뒤편에는 선원사 앞 담으로 보이는 돌담의 흔적이 확연히 드러나 보이고 같은 마을 이순태씨 집 뒤편엔 선원사 뒷 담의 절개지가 50~60m 가량 흔적이 있다.

 

   김택성씨 조부 김교창씨가 1919년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루기 이전 함께 암약하던 동료에게 선원사에 있던 주초 및 지대석 일부인 돌무덤을 대를 물려 보관해 오다가 일본인들의 후기손이 우려되어 집 앞 마당을 깊이 파고 그 돌을 쌓아 올려 돼지우리로 위장하여 실제로 돼지를 사육했었다는  에 따라 강화문화원 후손으로 199810월 말경 그 흔적을 발굴하여 본 결과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대형기둥(지름 60mm정도)을 세웠던 주춧돌 1개를 발굴하여 보관 중에 있다.

 

   선원사지로 추정되는 충렬사 부근은 옥곤(?)을 열어 놓은 듯 땅이 금잔을 받든 듯한 자리이다. 충렬사 주위가 광활한 구릉 지역으로 앞뒤가 막힘이 없는 지형이다.

 

  충렬사 앞에서 약80m 거리에 있는 밭을 논으로 개간 시에 발견된 승방의 구들장 등은 묻어버린 두 곳의 지주(地主)들이 선행리에 거주하고 있다.(유재순, 김용배씨)

 

   충렬사 뒤편 약 700m부터 선원면의 주산(主山)인 혈구산이 있고 동북쪽 좌측에 화산이 있으며 동쪽엔 꽃뫼뿌리가 있어 대단히 광활한 위치로 500여 간의 건물과 수백 명의 스님들을 충분히 거주하고도 남는 곳이다.

 

    충렬사 앞에 거주하는 김택성씨는 선원사 아랫담으로 추정되는 담돌을 헤치다가 우연히 인형과 같은 나한상(30cm) 1개를 발견하였다.

 

    집터를 파다가 고려자기를 발견 그것을 팔아 집을 공짜로 지었다는 설(신진숙씨의 증언)

 

   선행리 고 심형섭씨가 밭을 일구다가 절구 같은 것을 발견 지금도 밭 · 둑에 방치하고 있고, 같은 마을 김택성씨 담돌 중에 대형돌쩌귀 2개를 발견하여 보관 중에 있다. 지금도 김택성씨 집 뒤뜰에 가면 자기 파편 · 기와 등을 쉽게 볼 수 있다.

 

  소똑골 우물터 선원사 우물이라고 구전 되고 있다.

 

   선행리 유용복씨가 보안마을이라고 부르는 곳에 동철불상과 5층석탑 발굴하였다.

 

   선원사지 조사당시 이선근 조사 단장에게 고 김재수(언양김씨 김취려 장군 후손) 당시 강화문화원장이 반론을 제기하니까 무지의 소치라고 하는 위압적인 기에 눌려 말 문을 열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강화문화원 연구위원 이호경씨도 이선근 단장의 스승인 이병도 박사에게 서면으로 질의 하였는데 답신에서 "신니동 가궐지()도 귀견(貴見그대로라고 봅니다." 라는 대목이 있다.

 

   또한 이호경씨가 직접 찾아가서 이병도 박사를 만났을 때 "이군(이선근) 크게 실수 했구나." 라고 하여 시정하도록 말하여 줄 것을 요청하니까 "제자가 잘못해 놓은 것을 지금 내가 어떻게 말하겠는가, 내가 죽거든 세상에 밝혀 달라." 라고 하였다고 한다.

 

향토사학자 고두섭씨는 말한다.

   신니동 가궐이 신지동(현 선원사지로 지정된 곳)이 아닌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이암선생이 은거하던 해운당이 신니동 어디에 있었던가? 대장경판을 서문 밖 판당에 보관하였다는데 신지동 근처에 선원사의 말사(末寺)가 어디에 있는가?

 

맺는말

    사적 제259호 강화 선원사지 오지정(誤止定) 문제는 문화재청이 2017914일 현 선원면 지산리 선원사를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는 고려팔만대당경을 판각했던 선원사터로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입니다.”라고 1977년 사적 제259호 강화 선원사지로 지정된 것을 부정하는 문서를 남겼다.

 

   그러나 인천광역시와 강화군 그리고 조계종이 적극적인 역사적 진실을 밝히지 못한 상태에서 학생들을 비롯하여 국민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강화군 내에서 팔만대장경조판성지선원사라는 안내 표지판을 허락하고 있다.

 

   또한 강화군, 강화문화원, 강화향토사학자, 이병도 박사도 현재 사적 제259호로 지정된 선원사지를 정확한 옛 선원사지로 보고 있지 않는 입장이다.

 

   그동안 강화군과 동국대학교 박물관은 그간 20억 원 이상을 들여 선원사지 발굴 조사를 하였는데 뚜렷한 규명을 못한 상태로 앞으로 이러한 형태로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면 안 될 것이다. 현 선원면 선행리 충렬사 일원을 발굴 조사로 선원사지의 진실을 밝혀야 될 것이다.

 

   고려강화 선원사, 혈구산(혈구군 강화군 옛 지명)을 배산으로 하고 우측 남산, 좌측 꽃멧 뿌리가 고려국의 원찰을 호위하며 그 위용을 빛내고 있다.

 

  옷고름을 열어 놓은 듯, 금잔을 받쳐 올린 듯한 터 대한민국 선원사지 그 진실을 밝혀야 한다.

 

방방곡곡 뉴스 김지영 발행인 www.bbg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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