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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3/09/06  김지영
언양김씨 탐방, 강화군 김취려묘 성역화 기대

한국의 모범문중

언양김씨 탐방, 강화군 김취려묘 성역화 기대

 

김취려 고려명장 묘 성역화, 국민관광 · 교육현장으로

윤석열 대통령 · 유정복 인천광역시장 · 유천호 강화군수의 시대정신에 부응


김알지 후손 1270만 · 언양김씨 12만 5천 명의 숙원사업


김취려 고려명장 (문하시중)

 

언양김씨대종회

  언양김씨는 고구려를 이은 고려 · 신라 왕손의 전통을 승계한 한국의 모범문중으로 현시대 대한민국의 어지러운 사회에 본보기가 되고 한국문중의 애족정신이 자유평화통일 준비에 일조를 위하여 언양김씨 대종회 (회장 김강락)를 탐방했다.

 

  언양김씨 대종회는 지난 2023330일 전국 44차 정기총회에서 20대 김남전 · 김강락 대종회장의 이·취임식을 가졌다.


김남전 제18대 제19대 대종회장 이임사(離任辭)

 

  전국 각 지역에 계신 우리 언양종친(彥陽宗親) 종중원(宗中員) 여러분! 코로나19와 경제적인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 생활하시느라 얼마나 고생들이 많으셨습니까?

 

  저는 여러 종원님들의 사랑과 협조로 연임이 되어 6년 여간 우리 대종회를 위하여 저의 소임(所任)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성심성의(誠心誠意) 것 한다고 했습니다만, 미흡(未洽)한 점들이 많았으리라 생각됩니다.


  6년 전 성춘고문님, 하영고문님, 일웅고문님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되셨습니다만, 만희(주부공파승렬) 고문님과 17대 연식 회장님께서 대종회장이란 막중(莫重)한 임무(任務)를 저에게 적극 권유하시기에, 깜짝 놀라 여러가지로 역량(力量)이 부족(不足)하며 특히 지역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우니, 수도권에 우리 종친님들 가운데 재력(財力)도 풍부(豐富)하시고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시니 그 분들을 모시라고 하며, 사양에 사양을 거듭하였습니다만, 그때 전임 회장님들께서 하신 말씀이 이제 우리 대종회가 어느 정도 기틀이 잡혀 사무국에서도 잘 하고 있으니,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상경(上京)하며 있는 재산이나 잘 관리하면 된다 하시며, 다른 큰 부담감을 갖지 말고 맡아 달라는 말씀에, 그 뜻을 받아들여 전 회원님들의 찬성으로 막중한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6년 전 하셨던 말씀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저의 귓전에서 맴돕니다. 과연 제가 대종회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라며, 한편으로는 무거운 마음과 죄송스러운 마음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나 속절없는 세월 속에 벌써 6년 세월이 지나 그동안의 재임 기간을 돌이켜 보건대, 다행이 교통이 발달하여 일일생활권과 컴퓨터의 E-mail 또는 핸드폰 메시지와 카톡이 있어 자택근무로 대종회 업무를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어, 발달 된 문화에 감사함을 느꼈고, 특히 전임 회장님을 역임하셨던 고문님들과 18.19대 대종회의 임원님들 그리고 전국 각 지역()종친회장님 들을 비롯 전 종중원님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우리 대종회를 사랑하고 아껴주시는 그 힘과 실무를 맡고 있는 대종회 살림을 빈틈없이 잘 꾸려나간, 특히 병만 사무총장님과 인희 부장님의 정확한 행정시스템을 구축하여 탁월한 행정력이 있었기에, 저의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다는 점에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덧붙여, 저의 재임기간(在任其間) 크고 작은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만, 대강 저의 뇌리에서 몇 가지 떠나지 않은 일들을 회고해 보면, 첫째, 문열공 건재 김천일 선생전집을 발간할 때 최종원고(最終原稿)가 교정되기까지 연식 회장님과 전주 김익두 교수님과의 수차례 왕래하며 교정했던 그 흔적(痕迹). 둘째, 문열공 전집발간 출판기념을 하기 위해, 나주시청 산하 직원이 900여명이나 되지만 우리 언양김의 성씨(姓氏)를 가진 종친이 한분도 없는 사각지대(死角地帶)에 연식 회장과 병만 총장 3인이 마음조이며 나주시청을 드나들었던 일. 셋째, 소설가인 정찬주 작가가 문열공 선조님의 일대기를 배경으로 영산강의 꿈이란 주제로 나주시청 주말 연제를 써나갈 때 한 차례도 빠지지 않고 숙독(熟讀)하며, 작가(作家)와 전화 또는 문자로 격려 하면서 허심탄회(虛心坦懷) 의견을 서로 교정(校訂) 상담며 완성(完成)한 후 소설 서두(書頭) 작가(作家)의 말에 언양김씨대종회 김남전 회장을 잊을 수가 없다는 그 한마디의 글. 넷째, 희미했던 종사보감 발간에 성수 고문님의 그 큰 뜻과 협조에 너무나 친절하게 대해 주셨던 부산 강희 종친님. 광주 성노 종친님과 서울 대영(청계공) 종친님들의 성의 있는 협조.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 도와주신 장무공종중 회원님들과 강락회장님의 후원, 울산종친회 봉조 회장님과 이사님들의 적극적이고 열성적인 후원으로 역사적인 종사보감이 발간하게 되었던 일. 다섯째, 대종회 정관을 3회에 걸처 개정한 대종회비 징수제도 폐지, 전직회장단 자문위원회 설치, 여성위원회 설치, 청년위원회 설치, 지역파종친회 등록제도 등 행·재정시스템을 정비하여 언양김씨 대종회가 신뢰 받는 대종회로 언양김씨 발전에 동참 하였던 일. 여섯째, 강화 위열공 묘앞 상석교체 그리고 산소 주변 정리와 위토 확인 및 정리 차 강락 회장님, 병만 사무총장님과의 몇 차례 방문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일곱째, 어떻게 하면 우리 대종회가 좀 더 좋은 여건 속에 종사 일을 볼 수 있도록 회관 확장에 12만 5천 명의 종친이 염원해왔던 서울 미아리에 있는 회관이 일단 매각이 되어, 확장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일들이 저로서는 잊을 수가 없어 나열해 보았습니다.

 

  다음으로는 지금 우리 대종회는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보다 더 큰 대종회(大宗會)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대종회가 운이 좋아 다행이 부동산에 대한 식견이 풍부하신, 강락 전 장학회 이사장님을 이번 제 20대 대종회장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럼, 무슨 일이든지 한 사람의 힘으로만은 해낼 수 없습니다. 20 대 새 임원님들이 서로 협력하시어 우리 대종회가 오고 싶고, 만나보고 싶은 대종회로 더 한층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며 안정되고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는 12만 5천 종친의 보금자리 회관 마련과, 지자체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언양과 강화에 위열공 기마상이 우뚝 세워지는 날이 되면, 자랑스러운 우리 언양김씨의 위상이 더한층 높아지리라는 저의 소망과 아울러 제 20대 대종회가 안고 가야 할 큰 과제라고 생각하며, 우리 언양김씨대종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235

18 · 19대 언양김씨 대종회장 김남전 근배

 

김강락 제20대 대종회장 취임사

 

  존경하는 전국의 12만 5천 여 종인 여려분!

벚꽃이 만발한 따뜻한 봄날 제44차 정기총회에서 제20대 대종회장으로 선임되어 인준된 장무공파 36김강락입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저를 대종회장으로 선임하여 주신 것에 대하여 깊은 감사와 아울러 무거운 책임으로 대종회장직을 잘 수행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지금까지 언양김씨 발전을 이룩한 선대 대종회장님들에게 깊은 감사와 경의를 표합니다.

 

  선대 대종회장님들께서 이루신 업적의 토대 위에 제20대 대종회장으로서 몇 가지 과제를 가지고 추진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지금 제일 현안인 언양김씨 회관 매입 문제라고 봅니다. 부동산 경기의 침체와 고금리 등 불확실한 경제 환경에 대처 하기 위하여 우리가 구입 가능한 재원을 바탕으로 좋은 물건을 찾아 구입할 계획입니다. 모든 종인들께서 좋은 물건이나 정보를 제공하여 주시면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최상의 건물을 구입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강화 위열공 묘역 성역화 사업입니다.

강화 성역화 사업은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재산을 정리 강화 위열공 묘역 인근 임야 2천 여평을 구입하여 제각을 신축하고 주차장 시설, 진입로 확보, 역사체험장 조성, 수목갱신 등 사업계획을 구체화하여 강화군과 협의 추진하고자 합니다.

 

  세 번째는 선양사업으로서 위열공 기마상을 강화 · 울산 · 박달재 등 3곳에 건립하여 언양김씨의 위상을 높이고 자긍심을 갖도록 독지가를 찾아 10억원의 기금을 모아 건립을 추진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하지만 언양김씨 발전을 위하여 열과 정성을 다하여 헌신과 봉사로 최선을 다할 계획이오니 종인들 께서 다 같이 참여하여 주시고 협조하여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끝으로 우리 언양김씨 종인 여려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운이 함께하시기를 기원 드리면서 인사에 갈음하겠습니다감사합니다.

 

언양김씨 연원

 

    언양김씨 시조 ()은 신라 대보공 김알지(新羅 臺輔公 金閼智)28세 손인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일곱째 아들이시고, 고려 태조 왕건(高麗 太祖 王建)의 외손(外孫)이시다. 시조 선()께서 언양군(彦陽君)으로 봉군(封君 임금이 왕족에게 대군(大君)이나 군()의 작위를 내려줌)되시어 후손들이 관향(貫鄕)으로 하였다.

 

언양김씨 세계원류(世系源流)

      언양김씨의 발상지는 전설에 의하면 신라 제4대 석탈해 왕 9(서기65) 3월 모일 시림 숲 속에서 밤중 닭울음소리를 듣고, 석탈해 왕이 호공을 불러 알아보라고 하여 호공이 가서 살펴보니 금빛깔의 조그마한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는데 그 밑에서 흰 닭 한마리가 울고 있어 왕에게 아뢰어 그 궤짝을 열어보니 용모가 뛰어난 사내아이가 들어 있어 왕은 하늘이 보낸 아이라고 하여 기른 후 그 숲을 닭이 울었다하여 계림으로 고치고 나라이름도 계림으로 고쳤다. 그래서 이 아이 이름을 알지라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그 자손들을 김씨라 불렀다고 한다.

 

      관조 선() 김알지의 28세손 신라 56대 경순대왕의 일곱째 아들이시며 비()는 고려 태조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이시다. 언양군(彦陽君)을 수봉(受封)하셨기에 자손(子孫)들이 언양(陽彦)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경순대왕(敬順大王) 신라(新羅) 56()으로서 서기(西紀) 935년 재위(在位) 9년 만에 고려(高麗)에 손국(遜國)하시고, 882년에 생()하시어 9784496()로 붕()하시다.

 

       경순대왕(敬順大王)9분의 아드님과 세분의 따님을 두셨는데 아들만모셔본다.

  첫째() () 마의태자(麻衣太子) 후손이 부안김씨(扶安金氏)이다.

     둘째() () 후손(後孫)이 나주김씨(羅州金氏)이다.

셋째() 명종(鳴鐘) 후손이 경주김씨(慶州金氏)이다.

넷째() 은열(殷說) 후손이 경주김씨(금영김씨)이다.

다섯째() () 후손이 의성김씨(義城金氏)이다.

여섯째() () 후손이 강릉김씨(江陵金氏).

일곱째() () 언양군(彦陽君)으로 후손이 언양김씨(彦陽金氏)이다

여덟째() () 후손이 삼척김씨(三陟金氏)이다.

아홉째() 덕지(德摯) 후손이 울산김씨(蔚山金氏)이다.

 

본관향의 연혁


  언양(彦陽)은 본래 신라(新羅)의 거지화현(居智火縣)인데 헌양현(獻陽縣)으로 개칭 되었다. 다시 양주(良州)의 영현(領縣)이 되었고, 고려(高麗)때 울주(蔚州)에 예속(隸屬)하여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그 후 언양(彦陽)으로 개칭(改稱)하였고 조선(朝鮮)에 와서 그대로 따랐다. 1895년 군()으로 승격(昇格)되었다가, 1914년에 울산(蔚山)에 합병하여 속면(屬面)이 되었다. 현재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으로 개칭 되었다.

 

구국의 명장

고려시대 명장 김취려 (조선시대 명장 이순신)


위열공 김취려 문하시중(門下侍中) (1172~1234)


  어린시절 송악산에서 운도산인 정사대사의 신기한 가르침과 계시(啓示 사람의 지혜로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일을 신이 가르쳐 알게 함)를 받고 크게 깨달은 소년은, 학문과 무(武藝)를 더 열심히 익혀 강직하고 청렴한 인품과 자질(資質)을 겸비한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휘 취려(就礪), 엄격하고 공정하며 신중한 전략가(戰略家)로 장졸(將卒)들의 존경을 받았던, 고려의 명장(名將)이며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영상(領相)을 역임한 위열공(威烈公)이시며,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역임한 부친 부()와 모친 청리주씨(靑里朱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늠름한 소년으로 자라 음직(蔭職)으로 기용되어 동궁위(東宮衛)에 배속되었고, 이후 장군 대장군 상장군에 이르는 동안 명장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하여, 고종 때 나라를 구하고 전란(戰亂)을 극복(克復)한 영웅(英雄)이었다.

 

1216(고종 3)에 거란적(契丹賊 5세기 중엽부터 내몽골 시라무렌 강 유역에 살았던 몽골계와 퉁구스계의 유목 민족) 10만 명이 가족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 영주(永州) 석주(朔州)로 대거 침입 방화와 살인 약탈로 그 행패가 잔인하여 목불인견(目不忍見 참혹하거나 정상이 처참하여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음)이였다. 이때 그는 섭상장군(攝上將軍)으로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로 출정한 전사(戰史)의 일부이다.

 

거란군이 진을 치고 있는 개평역(開平驛)에 도착했으나, 거란군의 수효가 너무 많아 우군(右軍)은 서산(西山)의 기슭에서, 중군(中軍)은 들에서 조금 물러나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이때 취려장군이 칼을 뽑아 들고 기마(騎馬)를 채찍질하여 질풍같이 돌진하니, 이를 본 수하 장졸들이 용기를 얻어 결사(決死)적으로 돌격 전세(戰勢)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후퇴하는 거란 군을 계속 추격하자 그때 상장군 노원순(盧元純)이 이렇게 말했다.

 

군량이 처음 3일치만 가지고 왔는데 지금 다 떨어졌소. 그러니 연주성(延州城)에 물러가 뒷날의 기회를 도모하는 것이 좋겠소. 라는 이 제안에, 위열공은 아군이 여러 번 승전하여 투지(鬪志)와 사기(士氣)가 왕성(旺盛)하오, 이 기세를 타서 한번 싸워 본 뒤에 논의합시다제의했고, 위열공이 앞장서서 적군의 포위를 돌파한 전투에서 세 번이나 승리하고, 2400명이나 사살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이 전투에서 취려장군의 아들 단병(丹兵)이 전사(戰死)하였다.

 

전투의 승리에서 오는 기쁨과 아들을 잃은 비통(悲痛)함을 감내(堪耐)하며, 장군은 치중(輜重육군이 운반하던 온갖 군수품)부대를 보위(保衛)하면서 천천히 행군하여, 사현포(沙現浦)에 이르렀을 때에 강력한 적군의 매복 기습을 당했다.

 

취려장군은 급보(急報)로 원군(援軍)을 요청하였으나 자기들의 안전만을 생각하고 원군(援軍)은 오지 않았다. 장군은 홀로 고군분투(孤軍奮鬪 외로운 군사력으로 적과 용감하게 싸움)끝에 절묘한 지략(智略)과 전술(戰術)로 아군의 피해 없이 적을 격파(擊破)하고, 끝내 치중(수송)부대를 보호하여 박주에 도착하였다.

 

원수(元帥)인 노원순이 서문 밖까지 영접 나와서 위로와 축하하기를 아들의 전사슬픔을 위로하고 갑자기 강적의 복병을 만났는데도 자그마한 손실도 없게 적을 물리치고 3군의 군수품을 온전히 운반한 일은 장군이 아니고는 불가능한일이오라고 경의를 표하고 마상에서 술을 부어 승리의 축배를 들었다.

 

양군 장병들과 여러 고을의 부노(父老)들이 모두 절하며 말하기를 적의 강점지에서 맞아 싸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개평, 묵장, 향산, 원림의 여러 전투에서 후군(後軍)이 매 번 선봉으로 싸웠으며, 소수의 병력으로 매 번 대군을 격파하여, 우리 같은 노약(老弱)의 생명과 재산을 보존하게 하여주시니, 그 은덕을 생각하면 보답할 길은 없으나 오직 장군님에게 축수(祝壽)를 드릴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12162월 쫓겨 간 거란군은 군사를 재정비 연합하여 강력한 기세로 진격해왔다. 취려장군은 선봉에서 돌진 일당백으로 적장(敵將)의 수급을 수없이 베고 창과 화살이 온몸에 가득 꽂혀 상처가 깊었으나 충성스런 의분의 기세는 변함이 없었으며, 같은 해 5월에 대장군이 된 그는 가발병(加發兵)이라 일컫는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몸으로 황려현(여주)으로 향했다.

 

여주의 법천사 남강(南江)에 도착했는데 강은 홍수로 범람 충주성(忠州城)이 큰 홍수에 유실되고 도강(渡江)이 위태로 왔다. 이에 위열공은 먼저 군사들을 승선케 했고, 공은 마지막 배에 승선했으나 배가 큰 돌에 부딪쳐 배 밑이 뚫려 물이 차오르자 군사들은 공포에 사색(死色)이 되었다. 그러나 위열공만은 앉은 자세로 미동(微動)도 하지 않았으며, 이 일을 본 장졸들은 더 신뢰하고 존경하며 충성심을 발휘하여 정예군(精銳軍)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법천사 근처의 전투에서는 그의 계책인 군대를 나눈 협공책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잇따라 아홉 차례나 계속되는 전투 끝에 군수품 부족과 장졸들의 누적된 과로(過勞)로 후퇴했다.

 

12177월 거란장수가 인솔하는 10만 대군으로 충주를 거쳐 제천(堤川)의 박달산(朴達山)을 침공하여 왔다. 이때 취려 장군이 박달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전술전략(戰術戰略)의 일부 내용이다.

 

장군은 소년시절 정사대사의 가르침을 생각하여 신중한 작전을 계획 영상(嶺上)을 선점(先占)하고 용병술(用兵術)은 사람끼리 화목이 우선이나 지리(地理)는 더욱 경시 할 수 없다.

 

적이 만일 먼저 고개를 점령하고 아군이 그 아래에 있게 되면 날쌘 원숭이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말씀하시고, 장군 신덕위(申德威)와 이극인(李克仁)왼쪽을 막게 하고, 최준문(崔俊文)과 주공예(周公裔)로 하여금 오른쪽을 지키게 한 다음 위열공은 가발병(加發兵)과 함께 고개위로 올라갔다.

 

위열공이 예측() 했던 대로 거란군은 요새(要塞 국방상 중요한 지점에 마련해 놓은 군사적 방어 시설)쟁취(爭取)하려고, 좌우봉(左右峰)으로 돌진했고 이에 고개 마루에 미리 포진했던 위열공의 군사가 좌우(左右)에서 일시에 지리(地理)를 이용한 절묘한 전략(戰略)으로 협공하여 공격하니, 골짜기마수천 씩의 시체(屍體)가 혈하(血河)이루어 대승(大勝)을 거둔 혁혁(赫赫)한 전승지이다.

 

충북 제천시 박달령에는 대승한 취려장군의 전적비가 있어 지나가는 길손은 영상(嶺上)에 앉아 대첩고(大捷古事)를 되새기며 숙연해진다.

 

제천 쪽으로 패주(敗走)하는 거란군을 추격하면서 벌어진 6번의 전투에서 모두 연전연승(連戰連勝)하니, 거란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함경도 여진 땅으로 패주하였다. 박달령에서 일어난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경상도 지방은 전란(戰亂)의 화()를 모두 피하게 되었으나, 취려 장군은 오랜 전투에서 오는 누적된 과로(過勞)로 마침내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귀환하여 병을 치료하기를 권하는 여러 수장(首將)들의 말에 위열공은 차라리 변방의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집안에서 편안하기를 바라겠는가?” 듣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충성심과 애국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만하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귀환 치료를 명()하여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요양 치료하는 사이 취려장군에게 패해 쫓겨 간 거란군이 재정비하여 막강한 병력으로 수십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또 위협해왔다.

 

임금은 완쾌가 덜 된 취려장군에게 친히 지휘하는 기()와 도끼(살생권을 상징함)를 주고, 조충(趙沖)을 원수로 위열공을 병마사(兵馬使)로 명하여, 1218(고종 5) 96일 출전을 명했다.

 

장단(長湍)을 지나 동주(洞州)로 가다가 동곡(東谷)에서 적을 만나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위열공은 뛰어난 기상천외(奇想天外 보통사람이 쉽게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엉뚱하고 기발한 생각)한 전략전술(戰略戰術), 수천의 적을 사살 생포, 적장(賊將) 모극(毛克)고연(高蓮)천호(千戶)아로(阿老)를 사로잡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등 큰 전과를 거두자, 전의를 상실한 거란 군은 강동성(평남 강동)으로 패주(敗走)하고 말았다.

 

이 즈음 강동(江東)에 도착한 몽고의 원수(元帥) 합진(哈眞)과 찰자(札刺) 동진(東眞國)의 장수 완안자연(完顔子淵)등이 아군에게 강동성에 웅거하고 있는 거란족을 함께 토벌하자고 통첩 제의해왔다.

 

1219(고종 6) 몽고군은(징키즈칸이 유럽전역을 정벌하여 그 세력이 막강하고 흉폭 잔인했기 때문에) 아군을 도와준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모든 장수들이 꺼려 기피했다. 이런 상황에서 취려장군은 조충(趙沖) 장군에게 나라의 이해가 바로 오늘에 있고 만일 그들의 뜻을 어긴다면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길 것이오, 내 비록 재주가 모자라나 한번 가 만나 보겠소말하고, 십장군병을 거느리고 나서니 그의 늠름한 모습을 실제로 보는 듯 하였다.

 

몽고의 원수(元帥) 합진(哈眞)은 취려장군을 대면한 자리에서 나와 우호를 맺으려면 먼저 몽고 황제에게 절을 한 다음 만노 황제(萬奴皇帝)에게도 절을 하라요구 했으며 이 요구에 위열공은 하늘엔 해가 둘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 법인데, 어찌 두 황제가 있으리오(天無二日 民無二王 天下安有 二帝耶)대답 하고는 몽고 황제에게만 절을 하니, 그의 장수다운 품격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의 풍모(風貌)6()5()의 키에 수염이 배꼽 밑까지 내려오는 풍채와 언동(言動)에 압도된 합진은, 위열공의 손을 이끌어 앉히며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고 이어 합진은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그대가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그대가 형이요 이후로 나는 아우입니다말했다.

 

이 자리에서 합진은 내 일찍이 서역(西域유럽)6개국(個國)을 정벌하며 많은 장수와 호걸을 만났으나 형과 같은 호걸은 보지 못했다했고 다른 적장(賊將)들도, 취려장군은 고려에서 제일 지략과 무술실력(武術實力)이 뛰어난 장군으로 높이 평가 존숭(尊崇)했다.

 

위열공은 합진과 형제 의를 맺었고 따라서 모든 일들은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난공불락(難攻不落 공격하기가 어려워 함락되지 않는 요새)의 강동성을 공격 할 때는 성() 아래 해자(垓字)를 파서 적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만전의 준비를 해놓고, 몽고군 합진과 연합하여 공격을 하니 거란족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군졸과 부녀자 5만 여명이 성문을 열고나와 항복했다.

 

합진은 적장 1백여 명을 참수한 후 두 나라가 만세(萬世) 토록 형제(兄弟)가 되어 오늘을 잊지 말자청했고, 몽고 합진 장군은 김취려 장군을 존경하고 많이 흠모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몽고의 도움으로 고려는 거란을 평정했고, 국교를 열어 사신(使臣)의 왕래가 빈번했으나, 1225(고종 12)에 몽고의 사자(使者) 저고여(著古與)가 후금(後金)사람에게 피살(被殺)되는 사건으로 국교(國交)가 단절되었다.

 

몽고의 태종은, 1231(고종 18)에 살리타이(薩禮塔)를 총수로 삼아 침공해왔고, 이에 맞서 박서(朴犀)와 김경손(金敬孫)이 용전(勇戰) 했으나, 결국 강화(講和)를 맺게 되었으며, 서경 주현에 달로화적(達魯花赤) 72인을 머물게 했다.

 

그 해 620일에 왕도(王都)를 강화(江華)로 천도(遷都)하여 강도(江都)일컬었고, 이때가 위열공께서 서거(逝去) 2년 전 일이고 고려는 그 뒤 39간 강화도에서 비운(悲運)을 겪었다.

 

위열공은 전란(戰亂)에서 큰 공()을 많이 세웠을 뿐만 아니라, 1221(고종 8)에는 추밀원사(樞密院使2) 병부상서(兵部尙書3) 판삼사사(判三司事2)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2) 판호부사(判戶部事1)가 되었다.

 

1228(고종 15)에는 수 태부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守 太傅 中書侍郞平章事 判兵部事1)가 되었고, 그 뒤에 문하시중(門下侍中1)으로 영상(領相 현 국무총리)에 이르셨다.

 

위열공은 1234(고종 21) 향년 63세로 운명하시니, 시호(諡號)는 위열(威烈) 이다. 고종묘(高宗廟)와 숭의전(崇義殿)에 배향 되었다. 묘비명은 문신인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가 썼다.

 

전쟁터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나 부하에게 돌리고 스스로 내세우지 아니하고 술을 한 그릇에 담아 장졸들과 나누어 마시었다.

 

강직하고 청렴한 장군으로, 존숭(尊崇)과 흠모(欽慕)의 소리가 드높았던 위열공은 영상(領相)이 되어서는, 늘 안색(顔色)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자애롭게 통솔하고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충성되고 의로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동궁위에 배속(配屬)됨을 출발점으로 해서 장군(將軍) 대장군(大將軍)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던 위열공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은 그야말로 전란(戰亂)의 시기였다.

 

동아시아의 정세를 보면 몽고가 일어나 중국 화북 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금나라정벌했고, 금의 지배하에 복속(服屬)하고 있던 거란이 반기(反旗)를 들어 대요수(大遼收國)을 세웠다.

 

그러나 거란 또한 몽고의 공격을 받아 형세(形勢)가 불리해지자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북방지역으로 밀려 침법(侵犯)한 상황이었다. 그 후 몽고는 징기스칸이 유럽대륙을 정벌하여 그 세력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막강하고 결국 이와 같은 전란기(戰亂期)에 강직(剛直)하고 충성(忠誠)스러우며 청렴(淸廉)한 영웅호걸(英雄豪傑)인 위열장군을 태어나게 했다.

 

 

강화군 진강산 김취려 묘 출토

김취려(金就礪) 장군 묘지명(墓誌銘) (인천광역시 강화군 관광자원)

보관 : 서울 국립중앙박물관(No 11941)

연대 : 고종 21(1234)


김취려 고려명장 (문하시중) 묘지석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추증된 시호가 위열공(威烈公)이고 수태사 개부의동삼사 문하시랑평장사 상장군 판리부사(守太師 開府儀同三司 門下侍郞平章事 上將軍 判吏部事)인 김공(金公) 묘지명(墓誌銘)

 

금오위섭낭장(金吾衛攝郞將)이고, 아버지 부()는 금오위 대장군(金吾衛大將軍)이다. 어머니 대부인 주씨(大夫人 朱氏)는 검교장군 행낭장(檢校將軍 行郞將) 세명(世明)의 딸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재능과 학식이 넓고 깊었으며, 풍채가 훌륭하였다. 어려서 부음(父蔭)으로 벼슬하여 명종16년 병오년(명종 16, 1186)에 대오(隊伍)의 장()隊正으로 충원되었다가 태자부견룡(太子府牽龍)으로 옮겼다. 대정(隊正)으로부터 품계가 장급(將級)으로 올랐으며 몇 년 되지 않아 다시 바로 견룡행수(牽龍行首)가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어견룡행수(御牽龍行首)로 옮겼다.

 

지유(指諭)가 되어 1,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자 곧 변방을 막고 나라를 지키는 일에 모두 공적이 있었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대장군(大將軍)이 되고, 서북면 지병마사(西北面 知兵馬事)가 되어 장월(杖鉞)의 위엄으로 적의 예봉을 꺾었으므로 명성이 당시 우뢰와 같았다.

 

병자년(고종 3, 1216) 가을에 거란 적이 변경을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임금이 듣고 곧 삼군(三軍)에 명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다. 공은 후군사(後軍使)가 되어 양군(兩軍)과 함께 부대를 정비하고 나아가 적을 만나 싸워 크게 이기니 공훈이 많았다. 조양 개평 묵장 향산(朝陽開平墨匠香山)의 싸움에서 홀로 아군의 선봉이 되어 크게 격파하자, 그 적들이 아군을 피하여 서해(西海道)로 퇴각하였다.

 

정축년(고종 4, 1217) 1월에 임금이 행영원수(行營元帥)에게 오군(五軍)을 거느리게 하고 공을 금오위 상장군(金吾衛上將軍)에 임명하였다. 이에 후군을 이끌고 공이 행영(行營)하여 안주(安州) 부근에 주둔하였으나 행영이 패하여 도망하였다. 공이 홀로 힘써 마주 싸워 창과 화살이 몸을 뚫는 것도 알지 못하였으니 거의 죽을 뻔하였다.

 

명을 내려 (개경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나, 임금이 다시 오군에 명하여 남로(南路)를 막게 하고, 또 공을 다른 장수에 대신하여 전군사(前軍使)로 삼았다. 공이 이에 고통을 참고 명에 따라 행군하면서 적과 맥곡(麥谷)에서 싸워 이겼다. 박달(朴達嶺)에서 크게 승리한 이래로 적들은 세력을 잃자 마침내 남쪽방면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하여 그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11월에 공이 병이 들자 장수와 군사들이 모두 서울로 돌아가 병을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공은 차라리 죽어서 변경을 지키는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서울에서 편안하게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곧 조서가 내려와 공에게 서울로 돌아가도록 하니, 가마를 타고 서울로 오게 되었다. 그 후 치료를 거듭한 뒤에 병이 나았다.

 

무인년(고종 5, 1218) 정월에 신호위 판예빈성사(神虎衛 判禮賓省事)로 옮기고 9월에는 임금이 명하여 학사(學士) 조충(趙冲)을 중군원수(中軍元帥)로 삼고, 공을 부원수로 삼아 돕게 하였다.

 

원수와 함께 동주 성주 은주(洞州成州殷州)로 행군하면서 곳곳마다 적과 만나 모두 이겼다. 자주성(慈州城)에 웅거하게 되자 군사를 훈련시키면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자 하였다.

 

12월에 몽고가 동쪽 변방으로부터 국경을 침입해 들어와 몇 군데의 성을 잇달아 함락시키면서 양국이 강화함으로써 함께 거란 적을 물리치고자 하여 글[文句]을 보내어 아군의 병사를 내어주기를 청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용감하게 나서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였으나 공이 홀로 수염을 휘날리면서 소리 내어 말하였다. “일이 어렵더라도 사양하지 않아야 하는 법이니, 내가 곧 그 임무를 맡겠습니다.” 이에 일만 명을 거느리고 막하에 도착하였다.

 

몽고의 장수 합진과 찰자(哈眞及札剌)공의 나이가 몇 살이나 됩니까라고 물은 뒤 형이라고 부르기로 하고, 동쪽에 앉게 하였다.

 

몽고가 우리 공을 공경하는 것이 이와 같다는 소식을 우리 원수가 듣고, 모든 군대를 동원하여 에 이르니 적들이 두려워하며 나와서 항복하였다. 몽고는 기뻐하여 우리 군사와 더불어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고) 돌아가게 되니 공이 이에 조양(朝陽)까지 가서 송별하였다.

 

이 때에 이 있었으므로 공을 서경재제사(西京齋祭使)(삼았는데), 재제(齋祭)를 마친 뒤 영주(寧州)로 돌아와 원수와 함께 개선하였으며, 기묘년(고종 6, 1219) 3월에 임금께 복명(復命)하였다.

 

을유년(고종 12, 1225) 12월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고, 무자년(고종 15, 1228) 12월에 수대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守大衛 中書侍郞平章事 判兵部事)에 임명되었다. 경인년(고종 17, 1230) 정월에 판리부사(判吏部事)가 되고 12월에는 수대보(守大保)가 되었으며, 임진년(고종 19, 1232) 3월에 수대부 개부의동삼사 문하시랑평장사(守大傅 開府儀同三司 門下侍郞平章事)에 임명되었다. 계사년(고종 20, 1233)6월에 장대(將大)를 더하고, 이해 12월에 특진 주국(特進 柱國)을 더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의로우면서 용감하고 겸손하면서 강직하여서, 나가면 장수가 되고 들어오면 재상이 되니 나라와 가문에 도움을 준 것이 오래되었다. 갑자기 갑오년(고종 21, 1234) 24일에 병이 들었는데 21일이 되자 급하게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이다. 천자(天子)가 매우 슬퍼하고 조문하였다 한다.

 

공은 복야(僕射) 조언(趙彦)의 딸을 취하여 부인으로 삼았는데, 31녀를 낳았으며, 뒷일을 맡아서 712일에 진강현 대곡동(鎭江縣 大谷洞) 서쪽 기슭에서 장례를 지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지석 발견된 묘소)

참고문헌 :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國忠傚實錄

 

 

김취려 장군 강화묘소 성역화 사업 취진 돼야

(인천광역시 지방문화재 자료 25)

 

   언양김씨대종회 김취려장군 강화묘소 성역화 및 관광지 사업 취진위원회(위원장 김장희 전 경기도의원)는 지난 20234월 인천광역시에 본 사업 계획서를 제출한 바 있다.

 

김취려 성역화사업 취지

 

   김취려 장군은 풍전등화와 같은 고려시대, 북방민족 거란·여진을 박달재(박달령)에서 크게 무찔러 영남지역 및 충청·전라지역의 전쟁피해를 막았으며 또한 몽고의 장수 합진과 찰자를 설득하여 고려 침략을 연기시킨 고려의 명장으로 강화 고려정부 때 문하시중으로 임명되었고 고려 고종 21, 1234214일 돌아가셔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진강산 서쪽 (동쪽 이규보)기슬에 안장되었다.

 

   이에 윤석열 대통령의 시대정신과 유정복 인천광역시장의 인천의 꿈 대한민국의 매래를 개척하는데 강화역사문화도시로 승화시키고 정신문화적인 초석을 만들기 위한 사업이다.

 

 

사업개요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 71번지 일원 23,000

내용 : 1.비석/석조물/석등/향로서

2.사당(10, 기와 목조건축)

3.제실 (50, 기와 목조건축)

4.기념관(100, 기와 목조건축물)

5.김취려 장군 동상 (5, 규격 3*3*7m)

6.연못 (500, 연꽃 조경 등)

7.공원조성 (13,000, 장군동상)

8.주차장 (1,000)

10.화장실 (10, /)

 

사업예산

토지매입면적 임야와 전 약 23,000

토지매입금액 약 4,000,000,000

사업 총예산금액 10,000,000,000

 

참고자료

1. 김취려 장군 강화 묘소 성역화 · 공원화 사업안

2. 위렬공 김취려 사료집(고려명장 문하시중)

3. 김취려 장군 보도자료

4. 김취려 장군 묘지명 사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5. 김취려 장군 영정 (용산 전쟁기념관 봉안)

6. 김취려 장군묘와 주변 사진

 

  고대 국가에서 이어 이 나라를 지키신 순국선열분과 호국영령분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이 발전하고 우리 국민 모두가 잘 살 수 있다고

자부하며, 그 고마움을 잊지 말고 큰 공을 세우신 김취려 대장군님

의 묘소 성역화 사업을 잘 받들어 인천광역시 지방문화재자료 25

가 더 높이 평가되도록 힘을 모아 이뤄지도록 기대한다.

 

  위열공 김취려는 고려시대의 명장으로, 성웅 이순신은 조선시대의 명장으로 균형잡는 대한민국의 역사관 정립이 윤석열 대통령 · 유정복 인천광역시장 · 유천호 강화군수의 시대정신 정립이 될 것이다.

 

김지영 방방곡곡 뉴스 www.bbggnews.com

인천강화균형발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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