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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4/06/12  김지영
고려명장 김취려(金就礪) 장군묘 탐방

강화도 진강산(鎭江山) 정산에 올라 확인

마니산 마주하여 동서로 팔 벌린 형상에 오른 손바닥 중앙

고려정권, 문하시중(門下侍中/현 국무총리)예우를 다하여 모셨던 것

 

고려시대 명장 김취려(金就礪) (문화재자료 제25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71번지, 고려의 수도 江華 진강산 서쪽 대곡동 산세 수려한 터이다.

 

이곳에서는 언양김씨 대종회(김연식 회장)가 주관하여 매년 봄 춘향대제(春享大祭)를 올려 나라를 위해 헌신한 김취려 장군의 얼을 기린다.

 

 

김취려 장군의 묘는 진강산(443m)이 강화도 남단 마니산을 마주하여 동서로 팔을 벌리고 있는 형상에 오른 손바닥 중앙에 자리하고있다.

 

장군의 묘에서 진강산을 보면 수려한 능선과 기세가 넘치는 정상 산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울러 산 정상에서 김취려 장군의 묘를 보면은 또한 그 위용이 헤아려진다.

 

남쪽으로 마니산, 북쪽으로 덕정산, 혈구산, 고려산, 별립산, 봉천산이 강화도 산맥을 이루고, 서쪽으로 삼산면 해명산과 서해, 서북으로 교동도 화개산과 교동대교가 보이고, 동쪽으로 강화해협과 서쪽으로 인화~창후~황청~선수까지 감아 도는 해안선은 장관을 이루며, 옹기종기 모여있는 민가(民家)는 긴 역사서의 글자 처럼 선명하게 보이는 지형(地形)중앙에 고려정권은 김 장군에 대한 예우를 다하여 모셨던 것이다.

 

김취려 묘 위치, 택지 오른편

 

김취려 장군
김취려(金就礪)장군
(명종2~고종21,1172~1234), 본관은 언양(彦陽)이며 언양현 사람이다. 아버지는 금오위대장군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주씨로 수검교장군행랑장의 딸이다.

 

김취려 장군은 1186년 군대의 장수에 뽑혔고 얼마안되어 태자부견룡‧견룡행수‧어견룡행수의 직책을 맞으며 변방과 군내를 호위하며 대장군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서북면 지병마사가되었다.

 

1216년 가을 (고종3) 거란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삭주‧영주 등지로 침입하여 식량과 부녀자를 희롱하고 무고한 백성을 학살하자 김취려는 후군 병마사 자격으로 장군 기존정과 함께 앞장서서 적군의 포위를 돌파하여 분투하니, 그에 힘입은 군사들이 용기 백배하여 적을 무찔러 거란군 포로가 2400여명이나 되었다 한다. 이 전투에서 맏 아들이 전사하는 불운도 격었다.

 

또한 1217년 거란군 5천여명이 침략하자 전군병마사로서 적을 무찔렀고 다시 거란과 여진이 연합하여 침입하자 예주에서 교전하였으나 병으로 돌아 왔으며 1218년 (고종5)거란이 또 다시 침입하여 오므로 병마사가 되어 거란을 강동성(江東城)으로 쫓아냈다.

 

또한 몽고군과 동진국과 힘을 합쳐 강동성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업적으로‘증시 위열공수태사개부의동삼사 문하시랑평장사 상장군'(정2품이고 정원은 1명)에 제수되었다.

 

1234년(고종21) 강화에서 서거하니 고종이 친히 빈소에 나와 조의를 표하고 3일간 정사를 중지시켰다.

 

김취려 장군은 고종 6년 1219년 정월에 몽고와의 연합작전으로 강동성을 함락시키면서 거란군을 패배시켰던 당시 서북면병마사였던 그가 부원 사(副元師)급의 지위로 참전한 이 전쟁이 고려와 몽고와의 첫 번째 접촉이자 이후 몽고와의 관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때 나이 47세였던 그가 여러 관직을 거처 최고 지위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까지 올라갔다.

 

김취려 장군의 역사적인 평가는 고려사, 김취려 묘지명,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이제현의 김공행군기,고려사절요,조선왕조실록,신동국여지승람,구조방일,세종실록지리지,언양현읍지,조선왕조신록,세종실록,문종실록,세조실록, 성종실록,국조방목, 강제총화 동국병감,동사강목,이제현의 김공행군기 등의 사서에 기록되어있다.

 

김취려 장군 묘지명(국립중앙박물관 보관)

 

김취려 장군은 거란침략을 물리친 충의의 용장으로 몽고와의 관계에서 대외정세가 유동적인 상황에서 외교방식에 평화체계를 구축한 그의 결정적인 역할과 공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서도 크게 평가되었다.

 

김취려 장군의 인간적인 측면은 충직 그리고 의용(義勇)과 관후(寬厚)였다. 외모와 체격이 출중하였고 유달리 긴 수염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고려사에는 김취려의 키가 6척 5촌(195cm)이나 되는 체격에 수염이 길어 배를 지났으므로 예복을 입을 때마다 반드시 여종 2명에게 수염을 좌우로 갈라들게 한 다음 띠를 매곤 하였다. 합진(몽고장수)이 김취려의 용모가 뛰어나므로 크게 기이하게 여겼다 라고 기록되었다.

 

동문선에는 김취려는 제비턱 같은 기이한 모습이요, 이무기 수염처럼 특이한 풍체였다. 활을 쏘는 재주는 묘한 지경에 달하여 벽력의 소리와 같고, 전술은 귀신을 통하여 번개같이 빨랐다.

 

김취려 장군에 대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공직자로서 책임감이 투철하고, 전투에 임하여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있는 군인의 표본이었다는 점이다.

 

그 예로 이제현의 김공행군기에 묘사, 고종3년(1216) 가을 거란이 처음 침입하였을 때 3군의 후군사(後軍使)가 되어 전쟁에서“홀로 아군의 선봉이되어”적을 격파 하였다. 이듬해 1217년 1월 금오위 상장군에 임명되어 5군의 후군을 이끌고 안주 부근에 주둔하였는데, 行營이 패하여 도망하자“공이 홀로 마주 싸워 창과 화살이 몸을 뚫는 것조차 알지 못하였고”이 때 그는 거의 전사할 뻔 하였다고 한다. 등이 연구(한국중세사학회) 되었다.

 

언양김씨(彦陽金氏)는 신라 경순왕과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가 결혼하여 탄생된 김선(金鐥)을 시조로 언양(현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이 관향이다. 또한 김취려는 김선으로부터 8세손이다.

 

 

김취려 장군묘 찾아가는 길은 강화대교-강화읍-찬우물 3거리, 마니산 방향-인산저수지-마니산 방향 2km 하우고개/ 초지대교-온수리-3.5km 양도면 양도면사무소-300m 하우고개 (언양김공 취려장군 묘소 입구-산길로 250m)정상 부근이다.

 

김취려 장군 묘로부터 진강산 남단, 남한 유일의 고려시대 묘가 밸트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강화군에서는 ‘강화나들길’중 ‘능묘가는길’이란 관광 코스를 개발하여 고려 고종 홍릉을 비롯하여 김취려 장군묘, 정제두묘, 가릉, 석릉, 곤릉, 석릉, 허유전묘, 이규보 묘를 관광벨트로 만들어 놓았다.

 

방방곡곡 뉴스 金智寧 기자 www.bbg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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