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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2/11/18  김지영
강화군 고려시대 선원사의 진

강화 선원사 부남 8, 충렬사 부남 7리 설명으로 선원사지 진실을 밝힌다.

 

강화군 고려시대 선원사의 진실을 취재하며 언론사 방방곡곡 뉴스 고두섭 고문님의 사설을 올린다.

 

  이 내용은 필자의 논문에서 이미 상세히 밝힌 바 있으나, 아직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 다시 지형의 변화와 강화읍 내성 남문을 중심으로 구분하여 간추려 발표하는 바이니 이해 있으시길 바란다.

 

  선원사는 고려가 몽골과 항쟁하기 위하여 개경에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지 13년 만인 1245(고종 32) 당시 최고 권력자 최우가 대몽 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하여 건립한 사찰이며 당시 전남 순천에 있는 송광사와 함께 전국 2대 사찰 중의 한 곳이었다.

 

  그리고 이곳 선원사에서 팔만대장경을 16년간에 걸쳐 만들어 당시 서문 밖 판당(용장사)에 보관하다가 조선 태조 7(1398) 한양의 지천사를 거쳐 경남 합천 해인사로 옮겼다. 그 후 731년이 지난 1976년 박정희 정부의 문화재 및 사적지 조사계획에 따라 동국대학교 총장 이선근 교수가 이끄는 학술조사단에 의해 선원면 지산리 산 133번지에 있는 신니동 가궐지(가대궐터)를 선원사지라고 지정 고시케 하였다.

 

  선원사 건립 후 241년 만인 조선 성종 때 발행된 동국여지승람(1486)에 선원사는 부남 8리에 있었으며 장원서 과원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이 발행된 지 44년 만인 1530(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선원사가 부남 8리에 있었으며 장원서 과원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조선 숙종 22(1696)에 간행된 이형상 선생의 강도지에는 충렬사가 부남 7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선원사 터와 충렬사는 50m~60m정도 가까이에 있다.)

 

  그러면 충렬사는 언제 건립하였나?

  조선 인조 5(1627) 정묘년에 금나라의 침략 때 인조 대왕이 강화로 피난하여 갑곶리 진해루(외성문루)에 올라 대신들과의 회의를 주재하고 금나라의 요구대로 형제지국(금나라는 형, 조선은 아우)의 조약을 체결케 하고 120일 만에 환궁하였다. 그 후 9년 만인 1636년 청나라(후금국의 개명)가 침략한 병자호란 때 조정대신과 세자(봉림, 인평), 세손, 세자빈, 궁인 등을 대거 인솔하고 원임대신 김상용(전 우의정) 대감이 강화도로 건너왔다. 인조대왕은 다음날 강화로 오시려다 눈이 내려 길이 얼어붙는 바람에 어가가 미끄러지고 말이 넘어지는 둥 기후의 악조건과 더욱이 청병이 양천강까지 와 있다는 거짓 정보에 놀라 강화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그 후 45일간 남한산성에서는 극도의 혼란을 겪는다. 국방의 대비책은 당쟁에 묻혀 혼란의 연속이었으며 궂은 날씨와 추위 속에 청나라 병사들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협박을 해도 이빨 없고 발톱 없는 종이호랑이가 되어 척화파(화친배척파)와 화친파 간의 대립 속에 인조대왕도 갈팡질팡하다가 화친파 최명길의 제의를 받아들여 남한산성에 들어 간지 45일 만에 인조대왕은 삼배구고두례(三排九叩頭禮)로 삼전도(지금의 송파) 수항단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치욕적인 항복을 했다.

 

  “삼배구고두, 이마를 땅바닥에 대고 세 번 밀고 한 번 밀 때마다 땅바닥에 이마를 세 번 두드린다는 뜻으로 머리를 세 번 밀고 아홉 번 두드린다는 뜻이다.

 

  남한산성에서 45일간 버텨온 인조대왕은 강화도에서 김상용 대감의 구원병이 오기만을 기다렸으나 강화도가 청군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대왕은 하늘이 무너지는 좌절감에 성에서 나와 항복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면 당시 강화도의 사정은 어땠을까? 원임대신 김상용, 검찰사 김경징, 부검찰사 이민구, 유수(군수) 장신 등이 강화도 방어 책임의 주축이었다. 김경징은 도체찰사 김유의 아들로 성격이 괴벽하고 거만하여 책임자 김상용 대감의 말도 무시하기 일쑤였고 강도(江都)는 금성탕지인데 청병이 갑곶강 성애(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얼음이 깨져 조수에 떠밀려 떠다니는 얼음조각) 위를 날라 건너오지는 못하겠지 하고 자만하는 가운데 매일 주지육림에 묻혀 국방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봉림대군의 충고도 무시하기 일쑤였고 유수 장신과도 알력이 심했다. 어느 날 통진유수 김욱이 병사를 시켜 청나라 군사들이 수상한 행동, 초가집을 헐어서 석가래로 뗏목을 만들고 기둥과 대들보를 잘라서 동차(구루마)를 만드는 것을 볼 때 갑곶강을 건너려는 징조로 보인다는 연락을 해왔으나 검찰사 김경징은 이를 무시하고 편안한 시기에 혼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그 병사의 목을 베려고 칼을 빼어 들었다.

 

  이 때 갑곶 파수병이 황급히 달려와 청군이 뗏목을 타고 갑곶강을 건너온다는 보고를 받고서야 황급히 부랴부랴 갑곶으로 향했으나 이미 청병이 까맣게 떼를 지어 뗏목을 타고 건너오면서 홍이포를 쏴대니 맞으면 부서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했다. 겁에 질린 김경징은 읍내로 들어가 도성을 지키겠다고 도망치려다가 부하 대신 임선백의 만류로 읍성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강화 방어 책임을 진 자가 이러하니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이 모두 뿔뿔히 도망가버려 적과 맞서 싸우는 자가 없었고 오직 조선군 대장 중군 황선신, 천총 강흥업, 구원일 세 장수가 당산 고개에서 청병과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 싸움을 봉림대군이 목격하고 후에 삼충신이라 칭하고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당산 앞 진해산 마루에 제단을 쌓고 삼충단이라 명명했고 국가에서 제수를 하사하여 제향을 드렸으며 후에 표충단(충신의 표본)이라 개명하였다.

 

  청군이 갑곶강을 건널 때 해군의 전선들은 광성진과 월곶진 연미정에 집결하고 있었으며 강화유수 장신이 주사대장(해군책임자)이 되어 전선을 지휘 감독하였으나 청군의 도강 때 광성진에서 더리미를 거쳐 적군을 향해 올라오던 장신의 배가 갑곶나루 아래에서 썰물이 시작되자 겁을 먹은 장신은 적군과의 일전을 포기하고 징을 크게 울리면서 후퇴하였다. 충청수사 강진흔 소속전선 몇 척이 월곶진 연미정에서 내려오며 적선 몇 척을 격침시켰으나 주사대장 장신의 후퇴로 무위로 끝나버렸다. 청군이 제물진에 상륙하여 무혈입성 할 때 검찰사 김경징, 부검찰사 이민구, 주사대장 장신 등은 작은 배를 타고 도주하였다. 후일 이들은 잡히어 참형을 당했다.

 

  청군들이 2열종대로 칼날을 번뜩이며 갑곶리 알미골 근처에 이르렀을 때 원임대신 김상용은 도성 남문(지금의 김상용 선생 추모비각 앞) 위에 화약괘를 쌓아놓고 병졸을 시켜 성냥을 가져오게 한 다음 화약괘에 불을 붙여 폭사하였다.

 

  이 때 전 우승지 홍명형, 전 우승지 김익겸, 생원 권순장, 별좌 송시영, 사복시 주부, 이시직 전 사헌부장령, 심현 동녕부도정, 정백형 전 사헌부장령, 이상길 전 공조 판서 그리고 13세 손자 수전도 함께 폭사했다. 그 후 4년만인 인조 19(1641)에 강화유수 허휘가 공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현충사라 했던 것이 효종 9(1658) 충렬사로 사액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김상용 대감이 남문루에서 화약괘가 폭파할 때 신발짝이 날아가 떨어진 곳이라고도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잠시 피난 나와 살던 집터라고 전해져 그 자리에 충렬사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1976년 정부의 문화재 및 사적지 지정과 조사계획에 따라 동국대학교 총장 이선근 교수가 이끄는 학술 조사단에 의해 선원면 지산리 133번지 신니가대궐지를 선원사지()라고 조사 보고하여 사적 259호로 지정되었다. 당시 조사단들의 주장은 강화부남 7리 거리에 충렬사가 있다고 옛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데 선원사지는 부남 8리라 했으니 충렬사를 지나 1리 밖에 있어야 되지 않느냐 하면서 선원사지가 충렬사 문전일대라는 기록을 인정하지 않았다. 동국여지승람(1486) 간행 당시엔 선원사 옆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시기이다(행촌거사 이암 선생이 남산 해운당 아래에서 작은 배를 타고 선원사에 왕래했다고 했다 : (강도지)

 

  그렇기 때문에 강화읍 남문에서 구 남산리 도로(지금도 구도로가 있음)를 따라 중성문(광덕문으로 추정)을 나와 도보로 성 밖 서쪽 길을 따라 올라가다 관터 (간경도감터로 추정)마을 앞을 지나 선원사 뒷담(현 이순태 씨 집 뒤)을 지나 넘어 좌측 동쪽으로 돌아내려가면 충렬사 문전 일대 선원사 터를 만나게 된다. 여기까지의 거리가 3.2km(8)이다.

 

   그러면 충렬사는 왜 부남7리 거리인가? 조선 성종 때 간행된 동국여지승람(1486) 편찬 당시와 지금까지 지형의 변화가 없었다면 충렬사 거리도 부남8리 였을 것이다. 그러나 숙종22(1696)년 간행된 이형상 선생의 강도지(충렬사 부남7)가 발행되기까지 210년이란 세월이 흐른 시점에서 간행된 강도지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 천재지변 등으로 지형이 많이 변화 되었음을 생각해 보자. 다시 말해서 성종 즉위년(1469)부터 숙종22(1696)까지 227년간에 천재지변으로 선원사 앞의 바닷골도 메꾸어져 농경지로 변하여 중성문을 나와 남쪽 충렬사 쪽으로 직행하였기 때문에 부남7리가 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선원사 완공(1245)이후의 천재지변을 살펴보자. 고려 고종49(1256)2월에 수은비가 내리고 7월 대홍수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고려 원종10(1269)돌 풍우로 비바람이 심해 나무뿌리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아다녀, 고려 충렬왕 19(1293)4월 폭풍우로 마리산이 무너지고 각처에서 물난리 겪어, 조선 숙종 22(1696)5월 폭우로 전답이 매몰되고 각처에서 산사태 일어나. 이와 같은 천재지변으로 선원사 아래 바닷골이 매몰되어 육지로 변했기 때문에 남문에서 남산 밑 길을 따라 오다가 성문(신은하 씨 집 앞 삼거리)를 나와서 충렬사 방향인 남쪽으로 직행하였기 때문에 부남7리가 된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차량으로 거리를 측정해 본 결과 육지화 된 길로 직행한 거리가 2.8km(7) 였다.

 

  그렇다면 부남8리에 있었다는 선원사는 충렬사보다 1리 더 가야 되는데, 충렬사 문전일대 라고 주장함은 이치에 맞지 않는게 아니냐라고 하며 동국대 조사팀은 강도지,

강화부지 등의 선원사 터를 부정하고 신니동 가궐지가 부의 남쪽 8리 거리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신니동 가궐터(현 선원사지 라고 한 곳)를 강화부 ()남문 에서부터 구길을 따라 가보자. 남문에서부터 옛길을 따라 남쪽방향으로 가다보면 부조고개, 구신골을 지나 지금 명진 웨딩홀 뒤편 길을 따라 나오면 중성과 만나는 삼거리 문(옛 중성 서남문으로 추정)에 이른다. 여기서 좌측 동쪽 옥뿌리의 다리를 건너 꽃 뫼 뿌리산 옆길을 따라 내려가다 중마당 고개를 넘어 창골 양달마을에서 혈구산 쪽 서쪽으로 돌아 내려오다 대문고개(옛 중성남문 태안문이 있던 고개)입구에서 좌측 동쪽 동화촌마을 중간쯤에서 오른쪽 고창산 데뭇재 고개로 올라가면 강도 중성 동남문인 도문(장패문)터가 능선에 있으며, 장패문터를 지나 동남쪽으로 산을 내려가서 좌측 동쪽으로 약 100m 거리에 있는 신니동 가궐터에 이른다. 실제로 거리측정은 안해 봤지만 어림짐작으로 봐도 15리 정도는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길은 강화부 남쪽길이 아니고 동남쪽이다. 그래서 선원사는 신니동 가궐지가 아닌 충렬사 문전일대 부남8리가 맞다고 확신한다.

 

  지금까지의 내용은 강도 ()남문을 기준으로 하여 부남7, 8리의 거리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러면 더 자세한 역사를 살펴보자. 고려가 1232년 개경서 강화로 천도하여 1233(고종20)에 외성을 축조하고 1250(고종37)중성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내성은 궁성의 성격을 띠며 협소한 범위로 북산에서 시작하여 성마루 성공회 뒤편으로 하여 서쪽은 옛 도화정 자리로 내려와 지금의 강화읍사무소 뒤로 하여 선원선생 순절비각 옆으로 동쪽으로 연결되었던 성으로, 당시 남문이 지금의 선원선생비각 앞이었다. (고려 내성 정남문 승평문) 조선시대 내성도 고려시대 궁성터를 따라 쌓은 것 같으며 당시 남문에서 김상용선생이 폭사한 연대가 병자호란 다음해인 정축년 1637년이다. 그러니까 동국여지승람이 1486년에 간행되었기 때문에 ()남문(승평문)에서 선원사 거리를 측정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부남7리에 있다는 충렬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조선 숙종 3(1677)에 강화유수 허질이 내성을 확장 개축하여 전면은 돌로 쌓고 후면은 흙으로 하여 북산 너머로 하여 남산 등줄기로 범위를 연장할 때 내성 남문(안파루)이 지금의 남문이다. 그 후 숙종 22(1696)에 간행된 이형상 선생의 강도지에 충렬사는 부남7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었다. 당시에 ()남문은 없고 안파루(남문)만 있었기에 지금의 남문에서 부터의 거리가 7리 였을 것이다.

 

  옛 남문 터(김상용 선생비각 앞)에서 안파루(남문)까지가 약 1리이다. 지형의 변화로 인한 1리 차이도 이해가 되지만 조선 초기의 남문과 후기의 남문(안파루)을 기준으로 한 거리 측정이 이루어져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조선초기의 남문(구 승평문)을 기점으로 선원사지 거리를 부남 8리로 기록했고 조선후기 숙종 22년에 이형상의 강도지엔 충렬사 거리를 당시의 남문(지금의 안파루)에서 측정해서 7리 거리임을 알 수 있다. 양 대문(승평문, 안파루)을 기준으로 측정한 거리가 더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더 늦기 전에 잘못된 오지정 문화재를 재평가하고 선원사지를(충렬사 앞)조사하여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정확한 기록을 남겨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1. 선원사가 부남 8리에 있다는 기록은 1486년 조선 성종 때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 있고 이 당시의 남문은 고려궁지 아래 현 선원선생비각 앞이다.

 

  2. 충렬사가 부남 7리에 있다는 기록은 1696년 숙종 22년 이형상 선생의 강도지에 기록이 있고 당시의 남문은 안파루 즉, 지금의 남문이다.

 

1번의 동국여지승람 발행 당시 강도의 남문은 선원선생비각 앞이었으며 거기서부터 선원사까지의 거리를 측정해서 부남쪽 8리이며2번의 이형상 선생의 강도지 발행 당시의 남문은 지금의 남문(안파루)이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충렬사까지가 강화부남쪽 7리란 얘기다.

 

  이와 같이 지형의 변화로 살펴본 거리나, 두 건물(승평문, 안파루)을 기준으로 한 당시 남문의 위치로 측정해 본 거리나 1리 차이는 동일하다 ()남문부터 안파루 까지의 거리가 약 400m(1)이기 때문에 옛 문헌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본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관계당국은 오지정 문화재 선원사지를 재평가하고 재조사를 실시하여 부끄럼 없는 정확한 역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것이다.

(2021.12 고두섭 강화군향토사학자 · 언론사 방방곡곡 고문 글)

 

김지영 방방곡곡 뉴스 www.bbg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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