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양진교회 담임목사 최훈철
인천광역시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 Tel (032) 933 - 2782
|
|
강화출생. 강화고등학교졸업.
협신학대·동대학원졸업, 미국 켈리포니아 Azusa Pacifc University 에서 종교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01년 5월에는 오클라호마주 Oral Roberts Univer
sity에서“소그룹 성경공부를 통한 평신도 영적 양육 촉진”이라는 논문으로 목회학 박사학위를 취득
민족의 시련과 수난의 역사를 뼈저리게 경험했던 19세기말 강화도의 기독교 역사도 함께 시작 되었다.
신미양요를 통하여 서구인들과 전쟁을 치룬 경험이 있던 강화인들은 서양 선교사들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미국 감리교회의 존스 선교사가 갑곶 나루를 통하여 초기 선교를 시도했으나 지방유수의 격렬한 배척을 받음으로 결국 강화의 감리회 선교는 선교사들이 아닌 토착 교인들의 노력에 의해 급속하게 강화전역에 파급된다.
강화도 선교 역사에 초석을 놓았던 양사면 출신 이승환은 인천 제물포에서 처음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이후 고향인 강화군 양사면 증산(甑山)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존스 선교사에게 선상세례를 받고 그의 집을 거점으로 첫 번째 감리교 신앙공동체를 만들게 되었다.
1894년 시루미(증산) 이웃 교항 마을의 양반김상임이 개종하여 신앙 공동체에 합류함으로 초기선교가 지식인 상류계층까지 확대 되었고 교항에 독자적인 예배당을 마련하게 됨으로 강화선교에 기틀이 확고하게 세워진다.
교항에 12칸 초가를 구입하여 세워진 최초의 교회가 지금의 교산리에 세워진 교산교회이다. 이곳을 출발점으로 1897년 송해면 상도리에 홍의교회가 세워지고 1897년 지금의 내가면 고천리에 고부교회가 설립되었다. 고부교회를 통해 양도면 건평, 조산 흥천교회가 세워지고 서부 섬지역의 선교는 1898년 삼산의 송가 그리고 1899년 교동교회가 설립된다.
1900년 지금의 양사면 철산리에 산이포 교회가 세워지고 강화 선교의 구심점인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는 1900년 9월 1일에 설립된다. 강화선교가 시작된지 불과 10년 안에 강화지역에 복음이 확산되고 그 선교적 열기는 황해도 해주와 김포까지 교회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의 설립뿐만 아니라 한말 민족의 위기 상황에서 민족의 독립역량을 키우고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학교 설립에도 교인들의 영향력이 지대했다. 강화의 합일학교와 이동휘의 보창학교, 흥천학교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909년 강화 감리교가 운영하는 학교는 강화교동을 합하여 15개 학교에 학생수가 515 명이나 되었다. 이 학교를 통해 배출된 학생들은 교회와 사회 지도자로 활약하며 강화 교회와 민족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3·1운동에 이들이 주체세력으로 참여함으로 교회 교육을 통한 민족계몽운동은 지대한 것이었다.
이후 6·25 한국전쟁을 격는 민족적 고난속에서도 강화의 교회는 의료선교사업과 교육 선교사업을 꾸준히 진행시켜 나감으로 지역민들을 향한 사랑을 실천해 나아갔다.
세기가 두번 지나가고 선조의 숭고한 신앙 계승을 위해 강화 감리교회는 내·외적 성장을 거듭해 왔다.
외적으로는 117개의 교회와 약 2만명을 밑도는 공동체의 모양을 갖추었다. 이웃의 행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는 교회와 이름없는 교우들의 현실을 초석으로 사회와 개인의 혁신을 위해 지금도 몸부림 치고 있다.

전통으로 교회가 수행해야 할 사명은 말씀의 선포와 선교, 친교 그리고 봉사가 있다.
성경이 깨우쳐 주는 것처럼“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모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 버려져 사람들이 짓 밟을 뿐이라.” (마 5 : 13)고 하셨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잊지 않을 것이다.
빈곤과 불평등 그리고 소외계층을 향한 깊은 관심이 미래 감리교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근본적인 존엄성과 자유를 보호하는 일에 감리교회가 앞장 설 것이다.
강화양진교회 최훈철 목사
|
 |
|
| ▲ 농촌교회를 전원 휴양 기도의 교회로 활성화 시키는데 도시의 기독교인들의 관심이 필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