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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1/08/07  방방곡곡
동해시 무릉계곡에 숨어있는 한국문화유산
1300년의 전통문화 국행수륙대제, 한국문화유산으로 인정되야 할 것

동해시, 두타산(頭陀山) 삼화사(三和寺)

 

2011년 8월 3일 ‘방방곡곡 기자 클럽’ 여름 연수중 동해시 두타산 삼화사를 방문하여 김지영 대표와 최종옥 대한불교조계종포교사단, 강원지역단 팀장, 조계옥 보살과 삼화사 관련 미니 인터뷰가 있었다.

 

김지영 대표, 유서깊은 동해시의 삼화사를 이제야 찾아와 참배하게 되어 뜻깊게 생각합니다.

삼화사에 대하여 간략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선정화 최종옥 팀장, 삼화사는 642년 신라 선덕여와 11년 자장율사가 처음 터를 잡고 흑련대라 하였으나, 864년 범일국사가 삼공암이라 하다가 고려 태조 때 삼화사라 개칭하여 왕실과 인연을 맺고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국행수륙대제(國行水陸大祭)가 봉행되는 사찰로 1,300년 역사를 지닌 사찰입니다.

 

김지영대표, 삼화사 천왕문을 들어서며 본전(本殿)인 적광전(寂光殿)내의 부처님을 멀리서 보았을 때 뒤 광배의 원형금색과 어우러진 오묘한 힘을 느끼게하여 예사롭지 않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삼화사에는 어떠한 문화재들을 보유하고 있는지요?

 

선정화 최종옥 팀장, 삼화사에는 무릉계곡이라 천혜의 자연유산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인 철조노사나불상, 삼층석탑, 전적류(典籍類)를 소유하고 있어 그 긍지심을 갖고 또한 우리의 자랑입니다.

 

김지영 대표, 주차장 플래카드에 ‘덕주사본’(강원도유형문화재 제156호),‘갑사본’(강원도문화재 제150호)國行水陸大帝儀禮書 문화재 등록 경축, 이것은 어떤 내용인지요...

 

선정화 최종옥 팀장, 고려시대부터 조선을 거처 현재까지 시행되는 삼화사 국행수륙대제의 역사적 근거인 의례서가 문화재로 인정받은 것을 경축하는 의미로 알고있습니다.

 

김지영 대표, 삼화사에서 알리는 국행수륙대제 안내문을 보니, 본 행사는 하늘과 땅, 이승과 저승, 물과 뭍의 모든 중생들을 불법으로 소통하고 융합하게하는 행사로 업장소멸과 가족의 화목, 사회적인 통합을 위한 법식을 베푸는 행사라고 설명하고 있더라고요...

 

선정화 최종옥 팀장, 예, 옛날에는 신라, 고려, 조선의 통합과 안녕을 기원하는 국가적인 행사였다 합니다.

국행수류대제는 오는 10월 21~23일 까지 3일간 열립니다.

방방곡곡 언론사에서 전국에 알리어 본 행사의 역사적 의미와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김지영 대표, 상세한 설명 잘들었습니다. 주지스님께 인사드리며 더 깊이있는 인터뷰를 해야하는데 갑작스런 방문과 인터뷰로 간약하게 하게되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삼화사가 소원하는 국행수륙대제(國行水陸大祭) 봉행이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되기를 축원합니다.

함께하신 조계옥 보살님께 감사드리고, 인천 계양고는 제 아들이 다니는 학교인데 계양고에서 지구과학을 가르치는 홍연순 선생님을 따님으로 두셨다는데 보살님을 만나게 되어 좋은 인연이라 생각합니다.

 

두타산 삼화사가 소재한 강원도 동해시는 1980년 4월 1일에 태어난 도시다. 21세기 환동해경제권의 중심도시를 건설함으로써 균형 있는 국토 개발과 새로운 동해안시대를 개척 하겠다는 국가계획에 따라 기존의 삼척군 북평읍과 명주군 묵호읍을 통합하여 신도시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동해시가 20세기에 와서 어느 날 갑자기 탄생된 것은 아니다. 이곳에 신도시가 들어서기까지는 무려 2천 년이라는 장구한 역사의 산맥과 세월의 물줄기가 굽이쳐 흘렀다. 오늘의 신도시는 그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동해시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지석묘와 마제석검, 무문토기 등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 1천 년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지역이 역사의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2세기초 ‘실직국(悉直國)’의 이름이 나타나면서부터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신라본기 파사왕(婆裟王) 23년(102) 8월조 기사는 당시 이 지역에 실직국이라는 부족국가가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 무렵 실직국의 영역은 남쪽으로 영덕에까지 미치고 있었으나 파사왕 23년 신라에 항복함으로써 이후 이 지역은 신라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실직국이 신라와 쟁패하면서 싸웠던 마지막 전쟁터는 지금도 남아 있는 두타산성(頭陀山城)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지역을 차지한 신라는 지증왕 6년(505) 지방제도의 정비에 따라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사부(異斯夫)를 군주(軍主)로 파견했다. 고구려·신라·백제가 쟁패하는 상황에서 이 지역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 지역에서는 고구려와 신라가 여러 차례 접전을 벌였음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선덕여왕 8년(639)에는 진주도독부(眞珠都督府)로 승격시켰다. 삼화사가 최초로 개창된 것은 이보다 20~30년 뒤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을 통일한 뒤 통일신라는 지방제도를 중국식으로 정비하게 되는데, 신문왕 5년(685)까지 확립된 9주제에 따라 이 지역은 하서주(河西州)에 편입된다. 하서주는 명주(溟州)를 중심으로 강원도 일대 9개의 군(郡)과 25개의 현(縣)을 관장하는 지방정부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이 지역은 성종14년(995)에 정비된 12절도사제(節度使制)에 따라 척주(陟州)로 바뀌면서 중앙에서 단련사(團鍊使)가 파견된다. 다시 현종 때는 5도양계(道兩界) 제도로 지방조직이 바뀌면서 영동지방은 동계에 속하게 되었다. 지금의 동해시가 명주와 삼척 양쪽의 관할을 받게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지방은 세조 3년 (1457) 진(鎭)이 설치되면서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아래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에 속했다.

 

현대에 이르러 이 지역은 1955년 강릉이 시(市)로 승격되자 명주는 따로 군(郡)으로 분리되었다가 1980년 삼척의 북평읍과 명주의 묵호읍이 통합되어 동해시로 승격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이 지방에 독특한 전통과 문화를 만들어 냈으며, 많은 준재를 배출해 냈다. 고려 충렬왕 때 간관(諫官)이자 시인인 동안거사 이승휴(李承休, 1244~1300)가 외가 고장인 이곳에 머물며 삼화사에서 불경을 빌려 읽고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쓴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다.

 

임진왜란 때는 관군과 의병들이 삼화사의 병참지원을 받으면서 두타산성에 들어가 결사항전으로 왜군과 싸운 사실도 이 지방에서는 큰 자랑거리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우수한 인재를 중앙정부에 진출시키고 유교적 문화를 배경으로 독특한 향토문화를 만들어 낸 것도 주목된다. 조선 선조때 삼척부사를 지낸 김효원(金孝元)을 배향하고 있는 경행서원 (景行書院), 숙종 때 삼척부사였던 이세필(李世弼)을 배향하고 있는 용산서원(龍山書院)은 이 지방의 관리나 주민들로부터 한 번도 배척받은 일이 없었다. 오히려 지방관리나 주민들은 역사적으로 삼화사와 매우 친화적이었다.

 

삼척부사 김효원이 남긴 〈두타산일기〉는 두타산을 유람하면서 스님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일과 함께 삼화사가 훼손된 사실을 매우 안타까운 마음으로 묘사하고 있다. 비슷한 내용은 이 지방 유학자들이 두타산을 둘러보고 쓴 다른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들은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삼화사가 쇠락하고 있는 데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거나 스님들에 대한 우호적인 표현을 남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찰이 불에 타거나 어려움에 처하면 적극적으로 중창불사에도 참여한다. 이는 이 지방에서 불교와 유교가 대립하기보다는 조화로운 발전을 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지역민들의 향토에 대한 사랑도 남달라 특기할 만하다. 80세에 정승을 한 유명한 허목(許穆, 자는, 1595~1682)이 삼척부사로 있을 때 (1662) 이 지역의 인문과 역사를 정리한 〈척주지(陟州誌)〉를 지어 남긴 것을 비롯해 김종언(金宗諺)의 〈척주지〉·〈삼척군지〉·〈진주지〉등 향토지가 무려 5종이나 된다.

이는 지역민들의 향토애를 짐작케 하는 자료라 할 것이다. 이들 향토지에는 삼화사가 언제나 내고장의 자랑스러운 절로 소개되고 있다. 반대로 허목이 남긴 〈두타산기〉는 삼화사지에 전재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삼화사가 동해시의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친화적인 사찰임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고적(古蹟)에 이르기를 “자장조사가 처음 당나라를 다녀온 후 본국의 오대산에 돌아와 성인의 자취를 두루 유력하다가 두타산에 이르러 흑련대(지금의 삼화사)를 창건했다.

 

이때가 신라 27대 선덕여왕 11년이고, 당나라 연호로는 정관 16년(642)이었다. 절은 관음, 지장, 미타, 나한, 보질도 각 24방이었다. 뒷날 10리 서쪽 중대로 12방을 지어서 옮겼다. 그러나 회양의 재난으로 옛날 삼화사의 연대는 알 수 없게 되었고, 이를 기록한 문헌도 다 증빙 할 길이 없게 되었다.”

 

여기서 ‘고적(古蹟)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자료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앞서 살펴본 기록 외에 다른 자료가 더 있다는 것인지 전해 오는 말이 그렇다는 것인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삼화사고금사적》이《삼국유사》에 나오는 자장조사의 전기를 인용하여 창건의 내력을 밝히려 하고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면 자장율사가 이 절의 역사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만은 버릴 수 없다. 아무리 사찰의 역사를 고승에게 가탁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삼화사의 경우는 자장의 관여를 추정할 수 있는 정황적 증거가 도처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자장이 삼화사 창건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추정은 우선 삼화사의 지리적 위치와 관계가 있다. 자장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전기에 따르면 말년을 강릉(지금의 평창, 신라 때에는 평창, 강릉, 삼척지역이 다 강릉 관할이었다) 수다사에서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꿈에 문수대성이 나타나 “대송정에서 만나자”고 했다가 다시 “태백산 갈반지(葛蟠池,淨巖寺)에서 만나자” 는 약속을 한다.

 

자장은 문수를 만나기 위해 갈반지에 석남원을 짓고 기다렸으나 문수가 거지 행색을 하고 나타나자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문수는 “아상(我相)이 있는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느냐”면서 사라졌고, 자장은 문수를 쫓아가다가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감한다.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자장이 문수대성을 만나기 위해 몇 군데를 헤맨다는 사실이다. 이때 자장이 삼화사에서도 초막을 짓고 기다렸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러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암사사적편(淨巖寺事蹟篇)〉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자장은 귀국 후 황룡사와 월정사에 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고 이어 대화사(大和寺)와 사자산에 사리를 봉안했다. “이후 법사는 재차 대화사에 머물고 있는데 홀연히 범승이 나타나 ‘그대를 태백산에서 다시 보리라’ 하고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삼국유사》의 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삼국유사》는 자장이 수다사에 있다가 태백산 갈반지로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정암사사적편〉은 대화사에 있다가 간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삼국유사》를 보다 신빙성 있는 자료로 본다면 정암사쪽의 기록은 무엇인가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기록, 특히 고승의 기록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다.

 

그래서 향인(鄕人)의 기록도 때로는 귀중한 사료가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대화사에 머물렀다는 기록도 그냥 착오로만 단정할 일은 아니다. 《삼국유사》가 빠뜨린 기록을 사찰의 사적기가 적어 놓을 수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대화사’가 과연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자료상 자장이 관여한 절로는 울산에 있는 ‘태화사(太和寺)’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절은 자장이 중국의 태화사를 모방해 지은 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장이 강릉의 수다사를 떠나 문수대성을 기다렸다는 절로서는 거리가 너무 멀어 오히려 태백산에서 가까운 삼화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추론은 《삼화사고금사적》에 나오는 〈자장조사전기〉를 보면 하나의 윤곽이 떠오른다.

 

(자장은) 문수를 친견하기 위해 삼척주의 두타산에 찾아가서 삼화사지에 이르러 초암을 짓고 3일간 머물렀다. 이때 산음이 침침해서 열리지 않으므로 그 형세를 살피지 못하고 떠나갔다가 후에 다시 와서 팔척방을 창건하여 7일 동안 머물렀다. 뒤에 큰 소나무 밑에 (지금의 학소대 아래) 한 거사가 홀연히 나타나 말하기를 “예전에 했던 약속을 그대는 기억하는가?” 하고는 사라졌다. 스님은 그가 범승의 화현임을 알고 즉시 태백산으로 돌아가 기다렸다.

 

자료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지만 《삼화사고금사적》은 〈정암사사적편〉과 거의 비슷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정암사쪽의 기록은 자장이 머문 곳을 ‘대화사’로적고 있는 반면 삼화사쪽의 기록은 ‘삼화사’로 적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삼화사쪽의 기록이 훨씬 구체적이다.

 

이들 자료의 상관성과 동이(同異)관계는 자장이 삼화사 창건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추적하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한다. 즉, 자장은 태백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두타산 삼화사에 머물렀는데,〈정암사사적〉을 기록하는 사람이 이를 대화사로 기록했을 가능성이다. 삼화사 창건에 자장이 관여했다는 기록이 사중(寺中)에 남아 있는 한 이 기록은 그렇게 해석될 만한 충분한 개연성을 갖는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을 사실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장이 삼화사 창건에 관여한 시기에 관해서는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현재 정암사를 비롯한 월정사, 삼화사등 자장이 관여한 사찰의 창건연대는 한결같이 선덕여왕 11년(642)으로 기록되고 있다. 여기에는 분명히 기록자들의 착오가 보인다. 선덕여왕 11년은 자장이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한해전이다.

 

자장은 선덕여왕 12년(정관17, 643)에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귀국한다. 그리고 대국통으로 임명되어 선덕여왕 14년(645) 황룡사 구층탑을 완성한다. 진덕여왕 4년(650)에는 당나라 연호를 사용토록 건의하고 한해 전에는 중국식 제도에 따라 관복을 입도록 건의한다.

 

자장의 전기는 그 뒤 나이가 더 든 말년에 강릉 수다사에 머물다가 문수대성을 친견하기 위해 태백산 등을 유력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선덕여왕 11년, 즉 한 해 동안 삼화사를 비롯한 영동지방 사찰들을 창건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무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삼화사고금사적》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장의 귀국이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정관 17년이고, 또 경주에서 대국통으로 활약한 사실이 마지막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진덕여왕 4년(650)이라면 그 이전에 삼화사 창건에 관여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자장이 삼화사 창건에 관여했다면 그 시기는 《삼국유사》에 기록이 남아 있는 650년 이후라야 가능하다. 이는 앞으로도 더 상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삼화사의 창건과 관련해서 이밖에도 또 하나 검토해 볼 자료가 있다. 이는 자장이나 범일과 같은 인물과 관련된 것이 아니고 삼화사가 처음 터를 잡던 때의 설화에서 연유한다.

 

우선 《강원도지》에 실린 설화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옛날 두타산에는 3선(禪)이 들어와 산의 네 곳을 연꽃으로 표시했다. 즉, 동쪽을 청련대라 했으며 서쪽을 백련대라 했다. 그리고 북쪽은 흑련대라 했다. 또 이런 말도 있다. 옛날 서역에서 약사여래 삼형제가 와서 머물렀는데 큰형(伯)은 삼화사에 있었으며 가운데(仲)는 지장사에 머물렀다. 그리고 막내(季)는 궁방에 있었다.

 

이때가 범일국사가 굴산사로 오기 22년 전인 신라 흥덕왕4년(829)이라는 것이 《강원도지》의 기록이다. 《삼화사고금사적》은 이 설화를 좀더 구체화시켜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삼화사고금사적》의 기록이다.

고적에 말하기를 약사삼불은 본래 서역으로부터 동해를 지나 일편(一片) 석주(石舟)에 실려 와서 본국에 이르렀는데 가장 큰 부처님은 손에 검은 연꽃을 지녔고, 두 번째는 푸른 연꽃을 지녔고, 세 번째는 금색 연꽃을 지녔다. 하나는 흑련대(삼화사)에 있고, 하나는 청련대(지상촌)에 있으며, 하나는 금련대(영은사)에 있었다. 혹은 이르기를 세 부처님이 탔던 용신이 변하여 암석이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앞에서 살펴본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즉 승람은 “신라말에 세 사람의 선인이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여기에 모여 회생하였다”고 쓰고 있는데 《강원도지》는 이를 보다 신화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삼화사고금사적》은 보다 구체적으로 삼선(三禪)과 삼불(三佛)의 상관관계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들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은 “삼(三)자”가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도지에는 삼선이라든가 삼불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승람에서는 삼신인(三神人)이 머물렀다 해서 삼공암(三公庵)이라 했다로 적고 있다.

이러한 일치는 우연이기보다는 하나의 설화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이지만 나중에 사찰명이 삼화사로 바뀌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삼화사가 삼공암이란 이름 대신 삼화사로 개명되어 부르기 시작한 것은 고려초의 일로, 그 사연은 앞에서 인용한 그대로 “신성왕(神聖王, 고려태조)이 삼국을 통일하였으니 그 영험이 현저하였으므로 이 사실을 이용하여 절 이름을 삼화사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삼화사 사명(寺名)의 유래를 밝히는 단서가 된다.

 

지금까지의 검토에 의하면 삼화사 창건연대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이 창건했다는 7세기설이고, 또 한가지는 문성왕 때 범일국사가 개창했다는 9세기설이다. 마지막으로는 흥덕왕 때 창건됐다는 설이있다.

 

이중 세 번째 설은 신화적 요소가 많은 데다가 창건관계자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또 이 관련설화는 범일창건설의 전사적(前史的) 성격이 강하므로 범일창건설과 같은 범주에 넣어도 무리가 없다. 이렇게 되면 결국 삼화사의 창건은 자장에 의해서냐 범일에 의해서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중 하나만 취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두 자료 사이에는 모두 그럴듯한 이유나 근거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자료를 취하고 어떤 자료를 버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인가. 두 가지 자료를 동시에 수용하는 것이다. 즉 삼화사 창건에 최초로 관계가 있는 인물로는 가장 연대가 앞서는 자장을 택하고, 그로부터 2세기 뒤에 사굴산문이 명주를 중심으로 번창하는 과정에서 범일의 중창, 또는 삼화사의 사굴산문 편입으로 보는것이다. 여기서 자장을 취하는 또하나의 이유는 사전(寺傳)자료에 대한 신빙성이다.

 

삼화사가 17세기경 무려 다섯 차례나 사사를 정리하면서 자장을 창건주로 확정한 것은 무엇인가 근거가 있었을 것이다. 범일이나 자장이 모두 당대에 존경받는 고승이었으므로 삼화사가 범일의 창건을 굳이 자장으로 바꿀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더욱이 사전자료들이 그때로서는 ‘고적’이나 ‘고로(古老)들의 구전설화’를 취재해서 집필된 것임을 고려한다면 자장창건, 범일중창의 사사기록에 대한 신빙성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초창의 연대를 선덕여왕 11년(642)으로 기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앞에서도 검토했듯이 이때는 자장이 귀국하기 전이다. 자장이 영동지방 사찰창건에 관계한다면 《삼국유사》에 나오는 최종기록인 진덕여왕 4년(650) 이후라야 한다.

 

당시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서 국가적 존경과 귀의를 받던 자장이 영동지방으로 옮겨온 것은 그의 인생이 황혼기로 접어든 650년 이후의 말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건시기의 상한선을 아무리 올려 잡는다 해도 삼화사 창건은 650년 이전이 될 수는 없다.

 

이상의 고찰을 종합해 볼때 삼화사가 동해지방의 유수한 사찰로 기초를 닦은 것은 신라 진덕여왕 4년(650) 이후 자장율사에 의한 것으로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나 삼화사가 처음부터 대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직 절 이름조차 제대로 없는 작은 토굴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삼화사가 역사의 전면에 얼굴을 드러내게 된 것을 사굴산문으로 편입되는 문성왕 13년(851) 이후의 일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삼화사는 ‘삼공암(三公庵)’이라는 최초의 사명을 갖게 된다. 이때부터 삼화사는 명주 사굴산문의 수사찰로 사세를 거듭 확장해 나가게 되었다.

 

삼화사 천년의 미소

철조노사나불좌상(鐵造盧舍那佛坐像)

삼화사에는 신라 때부터 모시고 있는 철불이 1좌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부처님은 약사삼형제불로 서역에서 석주(石舟)를 타고 동해로 와 두타산에 앉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서역도래설은 동해안 일대의 사찰에서 몇 군데 더 나타난다.

이를테면 금강산 건봉사에는 53불이 들어왔는데 서역에서 배를 타고 왔다는 전설이 전한다. 또 경주의 기림사는 천축의 광유화상이 불상과 제자를 데리고 와서 절을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이는 동해안지방 사찰들의 불연(佛緣)이 멀리 인도에 닿아 있음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방편설화라 할 것이다. 삼화사 철불의 도래설도 이런 맥락 가운데 하나로 보이지만 이로 인해 지방주민들의 종교적 신심 또한 매우 두터웠던 점은 이 도래설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추측케한다.

 

다음은 <삼화사고금사적>에 기록된 철불의 유래와 그 뒤에 생긴 설화를 정리한 것이다.

옛날 아직 두타산이 절터를 열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삼척의 정라진 포구에 석주가 한 척 정박했다. 돛대도 없고 삿대도 없는 배였지만 스스로 미끄러지듯 뱃길을 따라 바다를 가르고 포구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정박했다.

배가 멈추자 선복에서는 잘생긴 육척장신의 대장부 세 사람이 내렸다. 세 사람의 얼굴은 모두 금빛으로 빛났으며 몸에는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이들은 각각 손에 연꽃을 한 송이씩 들고 있었는데 큰형으로 보이는 부처님은 손에 검은 연꽃을, 둘째는 푸른 연꽃을, 셋째는 금색 연꽃을 들고 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서역에서 온 약사불 삼형제였다.

약사불 삼형제는 곧장 서쪽으로 우뚝 솟은 두타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얼마쯤 걸었을까, 큰형으로 보이는 약사불이 걸음을 멈췄다. 좌우로 산세를 둘러보니 검음 바위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서 도를 닦고 중생을 제도할 만한 길지(吉地)였다. 형이 동생들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에 터를 잡겠다. 이곳은 천하의 명산이니 둘러보면 너희들이 머물 곳도 있을 것이다. 각각 터를 잡은 후 다시 만나자.”

 

이렇게 하여 큰형은 삼화촌에 자리를 잡았다. 둘째가 터를 잡은 곳은 야트막한 구릉이 있는 지상촌이고, 셋째는 그 보다 조금 떨어진 궁방촌에 자리를 잡았다. 삼형제가 자리를 잡자 곧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삼형제는 모두 변설이 뛰어나고 인품이 훌륭해 곧 이들을 교화해 제자로 만들었다. 제자들은 각각 자기들이 스승으로 모시는 약사불을 위해 절을 지었는데 큰형의 절은 흑련대, 둘째는 청련대, 첫째는 금련대라 했다.

 

삼형제는 때가 되면 흩어져 사는 형제를 찾아가 서로 위로하고 공부한 바를 토론하기로 했다. 두 아우가 형이 있는 곳으로 무리를 거느리고 찾아오면 형은 예를 다해 이들을 맞이하고 고준한 담론을 나누었다. 따라온 무리들은 이들의 담론을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맑아졌다.

 

또 얼마가 지나면 이번에는 둘째의 집으로 방문하고, 다음은 셋째의 집을 하는 식으로 돌아가며 방문했는데 그 우애가 지극했다. 이렇게 교화활동을 펴던 약사삼불은 사람들의 인심이 순화되고 불심이 깊어지자 이제 다른 곳으로 떠날 때임을 알았다. 어느 날 형은 동생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이제 이곳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정화되어 부모에 경순하고 형제끼리는 우애하며 이웃간에는 화목하니 더 이상 교화할 일이 없다. 그러나 아직 다른 곳에 있는 중생들은 마음이 거칠어 우리의 교화를 받아야 한다. 그러니 이제 곧 다른 곳으로 떠나자. 그러나 우리가 떠난 뒤 세월이 한참 더 지나면 인심이 다시 황폐해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떠나기는 하되 등신불(等身佛)을 남기고 가자. 그리하면 사람들이 그 등신불을 보고 언제나 우리의 가르침을 기억할 것이다. 등신불은 세세토록 변하지 않도록 철불로 남기는 것이 좋겠다.”

 

형의 말을 들은 동생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약사삼형제는 어느 날 철불로 등신을 남기고 두타산을 떠났다. 약사삼형제가 갑자기 사라지자 이들을 따르며 가르침을 받던 사람들은 각각 스승이 있던 곳에 절을 지었다. 큰형이 있던 삼화촌 흑련대에는 삼화사를 짓고, 둘째가 머물던 지상촌 청련대에는 지상사를 지었다. 그리고 셋째가 머물던 궁방촌 금련대에는 영은사를 지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철불에 공양을 하면서 세세생생 부처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부모에 효순하며 형제끼리는 우애하며 이웃과는 화목하게 살았다.

 

그로부터 강산이 수없이 변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약사불이 머물며 가르친 인륜과 도덕을 조금도 잊지 않았다. 오히려 철불을 친견할 때마다 불심은 더욱 깊어지고 마음은 더욱 맑아졌다. 사람들은 집안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절로 찾아와 부처님을 친견하고 이런저런 속내를 털어놓았다. 약사불은 등신불이지만 살아 있는 생불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믿음은 약사불과 사람들 사이를 보이지 않는 끈끈한 하나의 끈으로 묶어 놓았다. 그러다 보니 철불에 얽힌 수많은 영험설화가 생겨났다. 다음은 그 가운데 몇 가지다.

 

삼화사 아랫마을에 사는 한 농부의 아내가 어느 날 부처님을 찾아왔다. 온 마을에 전염병에 창궐해 남편이며 자식이 다 죽게 생겼으니 빨리 낫게 해 달라고 빌러 온 것이었다. 그녀는 지극한 정성으로 공양을 올리고 남편과 식구들의 쾌유를 기원했다. 그러나 전염병은 좀처럼 퇴치되지 않았다. 평소에 약사불을 집안의 어른처럼 공경하고 지내 온 아낙은 야속한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이 어찌 내 정성을 몰라주나 싶었다.

 

그녀는 생각 끝에 부처님이 평소에 잡숴 보지 못했을 것을 가지고 가서 공양을 하기로 했다. 그녀는 부처님이 평소 쌀밥이며 과일은 많이 드셨겠지만 고기는 한 번도 못 드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명태 한 마리를 사서 절로 가지고 갔다. 아낙은 스님 몰래 법당으로 들어가서 소원을 빌고 명태를 부처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나왔다. 그런데 아낙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깜짝 놀랄 일이 있었다. 남편이며 자식들이 벌떡 일어난 것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다른 집 부인들도 똑같은 방법으로 기도를 했다. 그랬더니 금방 온 마을에 전염병이 물러갔다.

 

그런 일이 있은 지 한참이 지났다. 이웃 마을에 사는 어떤 새댁은 시집을 와서 아이를 갖지 못해 애를 태웠다. 그녀는 이웃 마을 어떤 아주머니가 삼화사 약사불에게 기도를 해서 영험을 얻었다는 말을 듣고 절로 찾아가 기도를 했다. 그러나 좀처럼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새댁이 아주머니를 찾아가 “어떻게 기도를 해서 소원성취를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웃으며 새댁에게 슬그머니 이런 귀띔을 해주었다.

 

“부처님도 색다른 음식을 좋아한단 말일세. 그러니 명태를 한 마리 가지고 가서 공양을 올리게. 만약 그래도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삼화사 부처님이 고기만 받아 자시고 소원을 들어주지 않더라고 소문을 내 버려. 그러면 부처님이 난처해서라도 어떻게 해줄 게 아닌가.”

 

새댁은 아주머니의 말대로 명태를 실타래에 꿰어서 부처님 목에 걸어 놓고 소원을 빌었다.

“부처님, 만약 저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삼화사 부처님이 고기를 자셨다고 소원을 내겠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할 겁니다.”

 

이렇게 불공을 하고 나자 새댁은 정말로 임심을 해서 옥동자를 낳았다. 이 소문이 퍼지자 그때부터 소원이 많은 사람들은 스님 몰래 법당에 들어가 명태를 올려놓고 기도를 했다.

그러면 열의 아홉은 소원이 성취되었다.

 

삼화사 철불의 영험담은 이밖에도 많다. 조선 순조 때의 일이다. 어느 해 산불이 일어나 절이 몽땅 불에 타는 재앙을 입었다. 법당은 다 타고 철불만 동그라니 남아 있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불손한 생각으로 철불을 훔쳐서 달아났다. 철불을 지고 몇 발자국 움직이자 어디서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대성발악을 했다. 도둑은 혼비백산해 철불울 내려놓고 도망을 쳤다.

 

그후 또 다른 어떤 도둑이 철불을 훔치러 왔다. 그는 철불이 워낙 무거워 전체를 가지고 갈 수 없자 무도하게 한 쪽 팔을 잘라 도망을 가다가 신장(神將)으로부터 죄를 받아 입으로 피를 토하고 쓰러져 죽었다. 뒤늦게 불상이 없어진 것을 안 삼화사 스님들이 부처님의 없어진 팔을 찾아 이리저리 산속을 헤매다가 이를 발견하고 다시 모셔와 법당을 새로 짓고 봉안해 놓았다. 이 얘기는 <진주지>에도 실려 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해 장마가 들어 산사태가 일어나 중대사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로 인해 약사전이 무너지고 약사불도 매몰되고 말았다. 삼화사 약사불은 임진왜란 때 절이 불타자 중대사로 옮겨 지으면서 이곳에서 모셔 두었는데 중대사가 무너지면서 매몰된 것이었다. 그 뒤 이 약사불은 중대사터에서 밭을 일구던 어떤 농부에 의해 발견되어 삼화사로 옮겨졌다. 삼화사에 철불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나자 어느 날 한 골동품장사가 찾아와 철불을 팔라고 했다.

 

당시 삼화사 주지는 성암 화상이었고 신도회장은 김대승 씨였다. 김대승 씨는 부처님을 골동품으로 매매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반대했다. 그러자 골동품상은 스님 몰래 철불을 훔쳐 가마니에 싸서 묵호로 가지고 나갔다. 그 골동품상은 운임이 모자라 철불을 역에 맡기고 돈을 구하러 영주로 갔다.

 

이때 신이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 묵호에 주재하고 있던 어떤 기자의 꿈에 가마니에 싸인 철불이 보였다. 그는 꿈속의 일이 신기해 역으로 나갔더니 과연 가마니가 보였다. 기자가 역무원에게 물으니 화물을 맡긴 사람이 운임을 구하러 갔다는 것이었다.

 

기자는 경찰에 연락을 해서 철불을 지키고 있던 고물상의 아내를 취조하게 했더니 훔친 것으로 판명되었다. 철불을 훔친 골동품상은 영주에서 돈을 마련해 돌아왔다가 아내와 함께 철창으로 가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 철불은 다시 삼화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삼화사 철불은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견디며 지금도 그 옛날 훤한 장부의 모습으로 두타산에 처음 올 때의 모습 그대로 사람들의 귀의와 존경을 받으며 법당에 앉아 계시는 것이다. 그러니 이를 어찌 부처님의 영험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삼화사 철조노사나불좌상(鐵造盧舍那佛坐像) 연구

강화 백련사 철불(보물 제994호) 등으로 이 불상들은 대체로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들이다. 이밖에도 남원 대복사 철불, 해남 은적사 철불, 서산 일락사 철불 등은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삼화사에도 오래된 철불이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삼화사고금사적》에는 오래 전부터 이 절에서 봉안되어 온 사실을 적고 있다. 또 《진주지》를 비롯한 읍지나 군지 등은 이 철불의 수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선조 임진왜란 때(1592) 병화로 불이 났으나 약사전만이 타지 않았다. 현종이 즉위한 경자년(1660)에 중대사 구지로 이건했다.

순조 계미년(1823) 9월 8일 불이 났으나 역시 약사전의 철불만 타지 않았다. 그러나 중간에 도둑이 팔을 잘라 도망가다가 숲속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 절 스님들이 그것을 수습해서 다시 원래대로 복구했다.《척주지》

 

이 기록은 삼화사 철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정보를 제공해 준다. 첫째는 이 철불이 개창 또는 그 얼마 후 부터 존재했으며, 둘째는 그 존명은 약사불로 알려져 왔으며, 셋째는 중간에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이 기록을 뒷받침하듯 실제로 동해시 지가동에는 지상사가 있으며 이 절은 삼화사 철불과 비슷한 모습의 철불을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이 철불은 제작수법이 삼화사 철불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이 기록이 어느 정도 사실에 기초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즉, 서역으로부터 왔다는 기록은 그렇다 치더라도 최소한 지상사 철불과 동시대에 제작, 봉안됐음을 짐작게 한다는 것이다.

 

또 이 불상이 조선 중기 이후 불가피한 사정, 예컨대 전쟁이나 화재로 상당한 수난을 겪었음도 확인된다. 불상의 보존상태가 매우 심각하게 훼손되어 있는 것은 삼화사 철불이나 지상사 철불이 대동소이하다. 다행하게도 이 불상들은 근년에 이르러 다시 원형으로 복구되긴 하였으나 수난의 흔적은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철불은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 여러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 철불이 최초로 학계에 보고된 것은 신라오악학술조사단 태백산지구 조사반이 1967년 12월 제 7차 최종조사를 할때였다. 조사반원은 최순우, 진홍섭, 정영호, 김화영 이었는데 진홍섭은〈삼화사의 탑상(塔像)〉이란 보고서에서 당시 이 철불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철불은 하반신이 완전히 상실되었고 두 손도 없으나 상체, 특히 안면의 조각은 매우 우수하다. 현재 높이는 1.2m이고, 머리 높이는 40㎝, 어깨 폭68㎝, 두께는 0.5~1㎝이다. 머리는 나발과 육계가 뚜렷하나 윤곽이 분명하지 않다. 상호는 원만상인데 중앙에 우뚝한 코가 있고 콧날에서 연속된 두 눈썹이 반원을 그렸으며 이마에는 작은 백호공(白毫孔)이 있다.

 

두 눈은 반쯤 뜨고 있으며 눈꼬리가 옆으로 길게 연장되어 있다. 두 귀는 긴 편인데 귓밥이 모두 없어졌다. 입술은 두껍고 특히 윗입술이 부어 오르듯 두드러져 있다. 이는 고려시대 철불에서 흔히 볼 수 이는 특색 있는 형식이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법의는 통견(通肩)인데 융기된 것같이 보인다. 의문(衣紋)은 어깨에서 팔로 내려오면서 약간 변화를 보였고 팔에 걸쳐서 늘어진 옷자락은 비교적 사실적이다.

 

앞가슴은 노출되어 가슴 밑에 결대(結帶)가 크게 표시되었고 끝이 좌우로 길게 늘어졌다. 왼손은 완전히 파손되어 형태를 알 수 없고 오른손은 수평으로 들었음이 분명하나 손목 위치에서 부러져 없어졌다.

 

이 불상에는 목과 결대 위에 횡선이 있고 가슴 앞에 종선이 있다 이를 보면 여러 개의 틀에 의해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이 좌상인지 입상인지의 문제는 분명히 밝힐 수 없으나 현존 최하단부 우측이 앞으로 꺾이면서 연장돼 있는 점과, 불상의 일반적인 자세로 보아 좌상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존명에 관하여는 그것을 밝힐 아무런 근거도 없다. 끝으로 이 철불의 조성연대는 그 양식적 특징 특히 안면 처리에서 고려불상의 특징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삼화사 철불의 모습을 가장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 보고서의 내용에 따르면 1967년 당시만 하더라도 훼손상태가 매우 심했던 것 같다. 그 원인은 앞에서 말한 대로 조선 중기 이후로 여러 차례 화재와 인위적 훼손에 의한 것이었다.

 

또 한때는 골동품 수집상에게 팔려갈 뻔한 일도 있었다(삼화사 철불의 영험설화 참조). 뿐만 아니라 훼불의 상태도 매우 심각한 수준이어서 그대로 법당에 안치하고 불자들의 귀의를 받게 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이 불상은 재발견된 이후 한동안 단칸불전에 별도로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난에도 불구하고 이 불상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나 마침내 1990년 5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2호로 지정되면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호를 받기에 이른다. 특히 1997년 4월 5일에는 이 절의 주지 자광 원행(慈光 遠行) 화상의 원력으로 복원불사가 추진되어 파불이 아닌 예배의 대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원행화상이 이 불상의 복원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발견된 것이다. 이 자료는 다름 아닌 불상 배면에 돋을새김으로 남아 있는 명문이었다.

 

이 명문은 1행에 17자씩 세로 10행에 걸쳐 남아 있었는데, 이중 판독이 가능한 것은 모두 140자에 불과했지만 이로 인해 이 불상의 비밀 몇 가지가 밝혀졌다. 제작연대에 관해 지금까지 이 불상은 제작수법이 측면에서 고려시대 철불로 인정되어 왔다. 그리고 존상의 명칭은 창건설화의 기록에서 보듯이 약사불로 알려져 왔다.

 

러나 새로 발견된 명문을 세밀히 분석해 본 결과 이 사실이 모두 뒤집혔다. 즉, 불상의 제작연대는 명문이 이두문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빠르게는 7세기, 늦게 잡아도 하한선은 9세기말로 추정된 것이다. 또 제작수법도 다시 정밀하게 관찰한 결과 신라하대의 철불들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공통적 특징들이 확인되었다. 나발 위에 솟은 육계라든가 원만한 상호, 뚜렷한 삼도와 통견법의 등은 보림사 철불이나 도피안사 철불과 흡사했다. 명문이 나타난 것도 신라철불로서의 증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제작 당시 이 불상의 존명이 밝혀진 것이었다. 삼화사 철불은 오래도록 약사불로 알려져 왔다. 이는 창건설화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하지만 새로 발견된 명문에는 이 불상의 존명이 약사불이 아니라 ‘노사나불(盧舍那佛)’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명기되어 있었다.

 

삼화사 철불의 존명 확인은 여러 가지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우선 나말여초(羅末麗初) 불교계의 사상적 동향을 알아내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앞에서 예시한 문화재급 철불의 자료에서 보듯이 이 시기의 철불상 존명은 대개 비로자나불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나말여초의 불교사상계가 구산선문이 형성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화엄교학적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다.

 

삼화사의 경우처럼 신라말에 이미 선종인 사굴산문에 편입된 사찰에서 노사나불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그 이전에 화엄교학이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삼화사 철불의 명문은 앞으로 귀중한 연구의 자료로 이용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하여 파불상태에 있던 불상을 복원해 귀의의 대상으로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은 종교적으로도 매우 바람직한 일로 평가된다. 새로 복원된 불상의 좌대는 철원 도피안사 철불의 좌대를 그 모형으로 제작해 1997년 10월 28일 준공한 적광전에 안치시켰다. 법당의 편액은 당연히 대웅전이 아닌 적광전(寂光殿)으로 걸었다.

 

삼화사 삼층석탑(보물 제1277호)

옛 사람들이 이렇게 불탑조성에 열을 올린 것은 조탑공덕의 신앙에 따른 것이다. 《조탑공덕경》에는 탑을 조성하면 무한한 공덕을 쌓는다고 설명되어 있다.

이 경전에 따르면 조탑(造塔)을 할 때는 반드시 사리를 넣어야 하지만 여의치 못할 경우 경전을 넣어야하고, 최소한 경전을 요약하고 있는 사구게(四句偈)라도 넣으면 공덕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이 같은 조탑공덕의 신앙을 강조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정법을 기둥삼아 바른 종교생활을 해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불교가 흥성한 나라에서는 어디에서든 많은 불탑이 조성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석탑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서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무려 399기에 이르고 있다. 이중에는 25기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보물급은 103기, 지방유형문화재는 271기나 된다. 과연 ‘석탑의 나라'다운 면모라 할 만하다.

 

천년고찰 삼화사에도 석탑이 없을 수 없다. 법당 앞에는 고색이 창연하고 이끼가 가득한 옛 석탑이 하나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자못 범상치 않다. 규모는 3층으로 높이는 4.7m이다.

이 탑은 삼화사가 오랜 풍상을 겪으면서 소멸과 중건을 반복해 온 것과는 달리 비교적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어서 어느 절의 어떤 탑과 비교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이 탑의 구조와 상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아래쪽부터 보면 지대석(地臺石)은 남북으로 장대석(長大石)을 놓고 동서로는 그 사이에 끼도록 된 4매석(枚石)으로 구성하고 있다. 하대석과 중석은 돌 하나로 깎아서 5매석으로 하부기단을 만들었다. 하부기단에는 4우주(隅柱)와 각 면에 한 개씩 탱주를 세웠다.

 

갑석(甲石)은 평평하고 얇은 2매석으로 되어 있고, 윗면 중앙에 4분원(分圓)의 고임이 있으나 손상이 심한 편이다. 상부기단의 면석은 각면을 돌 하나로 구성하였고 우주와 탱주가 표시되어 있다. 대기단(大基壇) 갑석은 한 장으로 된 판석(板石)인데 윗부분에 경사가 있고 4분원은 고임이 조각으로 나타나 있다. 그 위로는 윗면의 4분원의 고임이 있고 아랫면은 안쪽을 곡선으로 깎은 별석(別石)을 끼워 탑신을 받치도록 하고 있다.

 

다음으로 탑신을 살펴보면 옥신과 옥개(屋蓋)는 각각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초층탑신은 거의 입방체에 가깝고 4우주가 표시되어 있으나 약간의 손상이 있다. 2층과 3층의 탑신은 초층에 비해 조금씩 줄어들어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다만 3층탑신이 크게 손상되었고 2층탑신은 두 조각으로 갈라져 안타까움을 더해 준다. 옥개석은 받침이 각 층마다 사단으로 되어 있으며 큰 면이 탑신을 받치고 있다. 이들 옥개석의 배치는 초층이 2단이고 2층과 3층은 1단이다.

 

마지막으로 상륜부(上輪部)를 살펴보면 긴 찰주(擦柱)가 남아 있으며 여기에는 상륜의 노반(露盤)과 복발(覆鉢), 보륜(寶輪)이 꽂혀있다. 또 따로 다섯 개의 철환(鐵環)도 남아 있는데, 이는 보륜과 보륜 사이에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찰주 정상에는 보주(寶柱)를 나타내는 주물로 만든 철주가 꽂혀 있다.

 

이 석탑은 기단부와 상륜부가 특히 손상이 심할 뿐이고 나머지는 대체로 원형을 알아보는 데 지장이 없다. 또 초층탑신 밑에 별석의 받침을 끼워 시대적인 특색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신라석탑 이후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따라서 삼화사 삼층석탑의 건립시기는 늦게 잡아도 신라말로 추정된다.

 

1967년 이 탑을 실측 조사한 신라오악학술조사단은 보고서를 통해 ‘삼화사 삼층석탑은 동해안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수작'이라고 평가하면서 그 예술적·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이 탑은 1990년 5월 강원도 문화재자료 113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등급은 1997년 6월 이 탑을 중건 이전하는 과정에서 사리함과 소탑이 발견됨으로써 학계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으며 보다 높은 위상으로 재평가되었다.

 

불교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기 절대연대를 가지고 있는 유물 유적의 발견이다. 모든 연대추정은 이 유물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삼화사 석탑은 그 증거들을 보여 줌으로써 스스로 신라시대에 조성된 탑임을 입증한 것이다.

 

삼화사 삼층석탑이 현재의 장소(중대사터)로 옮겨진 것은 1979년 12월이었다. 삼화사가 쌍용양회의 채광권 안에 위치함으로 해서 더 이상 사찰로서의 역할이 어렵게 되자 1977년부터 이전사업을 시작한 끝에 마지막으로 탑을 옮겨온 것이다. 이때 이 탑은 법당 앞마당이 아니라 화단 왼쪽에 세워졌다. 이 탑을 다시 현재의 자리로 이건한 것은 삼화사를 옛 모습에 가깝도록 복원하려는 자광 원행(慈光 遠行)화상의 원력에 의해서이다.

 

스님은 우선 관계 전문가의 자문을 얻어 천년석탑의 자리를 다시 선정했다. 당시 자문에 응했던 전문가들은 이 탑이 공양탑이 아니라 불탑으로 조성된 것이란 점을 들어 가람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현재 삼화사의 가람배치상 중심이 되는 곳은 큰법당 아래 마당이다. 그리하여 당국의 승인을 얻어 이건에 착수한 것이 1997년 4월초였다.

 

삼화사는 먼저 탑이 위치할 장소에 사방 3.2m, 깊이 1m의 흙을 파낸 다음 굵은 마사와 적심석으로 지반을 다진 뒤 기단은 지면보다 약간 높게 하는 기초작업을 했다. 이어 4월 25일부터 석탑의 해체작업에 들어갔는데 여기에서 뜻밖의 소장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초 관계자들은 이 탑을 이전한 지가 18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소장유품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상층기단부 중심부에서 목제함과 납석제 소형탑 25기, 청동제 불대좌편(佛臺座片) 2개, 철편(鐵片) 6개가 쏟아져 나왔다. 이중 소형 납석제탑은 원형이 거의 없고 파손된 것이 많았으나 그것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나오는 것들이었다. 이것들은 이 탑이 1979년 이건될 때 발견된 것을 그대로 부장한 것이었다.

 

삼화사는 이중 철편은 철불의 파편으로 보고 철불 복원때 제자리를 찾기로 하고 나머지는 다시 안치했다. 이와 함께 원행화상이 봉안하고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사리 1과(顆)와 불자들의 공양물들을 사리함에 넣어 초층탑신 사리공내에 봉안했다. 이 이건불사가 완료된 것은 1997년 5월 4일이었으며 봉탑낙성법요를 거행한 것은 그 해 부처님 오신날이었다. 현재 국가 지정문화재 보물 제 1277호(1998. 6. 7)로 지정되었다.

 

여기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점은 이 탑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에서 나오는 부장물들이 나왔다는 사실이다.

이것들은 이 석탑의 조성연대를 통일신라시대로 잡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이와 함께 다시 검토된 양식적 특성도 주목된다. 이 탑은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 등 석탑을 이루고 있는 세가지 구성요소가 그대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기단부의 구성과 특히 탑신부의 굄대를 별석으로 만들어 끼운 점, 그리고 각 탑신석과 옥개석의 조성양식과 수법 등이 매우 균정하고 단아하다.

이는 신라석탑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이 탑의 조성 연대가 늦어도 9세기 중엽이라고 최종적인 단정을 했다.

 

삼화사 석탑의 조성연대가 이같이 상향조정된 것은 이절의 철불 제작연대가 명문의 발견으로 상향 조정된 것과 함께 삼화사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는 또 하나의 자료라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방방곡곡 김기환 ․ 정남석기자 http://bbggnews.com

자료제공: 동해시 두타산 삼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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