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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1/10/10  김지영
향송 김지영 고은 시인과 만남...
고은 시는 구성이나 문장이 규격화 되어있진 않으나 그 흐름속에서 스스로 규율이 만드어져 독자들을 단도리한다.

고은 시인과 첫 만남

 

2011년 10월 3일 개천절, 자유로를 상징하는 파주출판도시에서 고은 시인과 첫 만남이 있었다.

 

그 만남은 경기도 파주출판도시 지지향 로비에서 김언호 한길사 대표의 사회로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리고 고은 시인 詩를 읽다.’ 행사장에서 였다.

이날 행사에서 정태선 한국무용가(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이수자)의 살(煞)풀이 춤으로 고은 시인 시낭독회의 흥을 내게하였다.

또한 이건용(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작곡가는 고은 시인의 ‘음파에서’시를 작곡하였고, 그 곡을 바리톤 장철 교수는 맹은정 교수의 반주로 연주를 하였다.

 

고은 시인은 포도주 한두잔들며 몸으로 표현하는 열정적인 시 낭송, 함께한 200여명의 청중을 감동시키는 자리가 1시간 30여분 계속되었다.

새로운 책은 어디 있는가

만 권의 책이여

한잔 술 나누지 않고

너를 버린다

거리에는 쓰레기 널려 적막하지 않구나

너를 버린다

만 권의 책이여

아니다

아니다라고 항의했건만

너와 나 사이

그 불화보다 어리석은 평화가 와서

너를 버린다

드디어 벙어리 낮달의 인내 아래

나는 떠난다

이제까지의 책이 아닌

새로운 책을 위하여

나는 떠난다

몇 번이나 너를 버리고

어디인가

어디인가

새로운 지혜의 지옥을 위하여

나는 떠난다

 

아기의 노래

이 세상에 아기 없으면

이 세상이 아니옵니다

돌아기 아장아장

엉덩방아 찧는 날

그날이 비로소 이 세상이옵니다

이 세상에 아기 없으면

이 세상이 아니옵니다

어린아기 우는 밤

그 밤이 비로소 이 세상이옵니다

이 세상에 아기 없으면

이 세상이 아니옵니다

무럭무럭 자라나

저기저기 손가락질

그곳이 비로소 이 세상이옵니다

낙조

할 일이 있다

석양머리 아라비아 하늘 가득히

떠나가는 자식들

시뻘건

시뻘건 낙조를 칠하여

불 삼켜라

거기가

네 나라

할 일이 있다

석양머리 바시 해협

시뻘건 낙조로 뒤덮여

울고 싶거든 울어예어

거기가

네 나라

할 일이 있다

석양머리

동아시아에 이르러

오랜 세월

그것이 새로운 육체

 

아리랑

슬픈 나라

그 가난 견디어

앞산에 쌀 가득히

아리랑이었다

슬픈 나라 잃었을 때

그 슬픔 견디어

멀리 멀리까지

아리랑이 나라였다

몇천 년 산길 물길이

아리랑이었다

마을 너머

고개 하나 고개 둘

아리랑이었다

삼천리 남북의 강토

그 어디메

번개 벼락 뒤에는

다시 아리랑이었다

오래오래

아리랑 아라리요 부르는 삶이었다

 

나의 시

1950년대 그 페허 영년(零年)의 시절

하염없는 떠돌이였던 나에게는

전쟁 이후 여기저기 남겨진 마침표가

뜻밖에도 구원이었습니다

한마디 말 끝의 검은 점의 거룩함으로

그 뒤에 이어지는 말들이 이따금 반짝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시에 마침표를 자꾸 찍고

싶었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

나의 시는

강물 기슭의 맴도는 물인 듯이

먼 길 앞에서 주저하다가

얼떨결에

강물 한복판으로 나아가 흘러갔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의 시에는 마침표가 없어졌습니다

그동안의 구원은 해진 신발처럼 무효였습니다

마침표 없는 시만이

한 편의 시로 끝나지 않고

다른 시로

다른 시로 이어졌습니다

어둠 속에 숨겨진 불빛 쪼아내어

그것으로 사물과 사물의 배후를 겨우 볼 수

있었습니다

이세상의 어지러운 운행은

나의 시 이전에도

이미 단 하나의 마침표 따위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따라

마침표 없는 나의 시야말로

어쩔 수 없이 운행이었습니다

어절 수 없는 윤회였습니다

그것밖에는

모든 지각은 착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시가

날마다 떼지어 날아오르는 새떼로

떼지어 내려앉는 새떼로

다른 시인들의 시가 되는 날들을 꿈꾸었습니다

오 새벽의 프른빛이란

얼마나 숨찬 찰나의 음역(音域)입니까

그러나 오늘 하루가

수많은 지난날들의 지칠 줄 모르는 강물로

흘러가며

나의 시는 내일도 모래도 마침표가 없습니다

 

한반도 시편

우리 한반도에서는 새가 노래한다고 말하지 않고

새가 운다고 말한다

어느 때는 노래가 울음이었고

그 어느 때는

싸잡아 울음이 노래였다

심지어는

마을마다 한두 마리 도야지까지도

꿀꿀꿀 운다고 말햐야 한다

그렇기도 하겠다

막 태어난 갓난아기 시뻘건 볼기 때려

응애

응애

응애

그 첫 울음소리가

어찌 슬픔이겠느냐

허나 갓난아기가 운다고 말한다

봄이 부산떨다가 가고 있다

아직 으슬으슬

이어갈이 모내기 마친 논마다

밤새도록

몇천 마리 개구리들이 울고 있다

어떤 생각

어떤 느낌 하나 없이

오로지 그 울음소리 자체로 떠나려가고 있다

밤새도록

한여름

불볕 땡볕 가득히

여기서도 저기서도 울어대고 있다

매미 울음소리

그것 하나만으로도

하루가 저무는 까닭이었다

그러다가 구죽죽이 비라도 오는 날에는

비에 젖은

뻐꾸기 울음소리

뻐꾸기는 간데없고

그 울음소리만 빈 골짜기 가득 차 있다

어느덧 가을 귀뚜라미

달빛 시린 울음소리

달 진 뒤

그 어둠 속 새로운 울음소리

단 하나로

온 세상이 빛나고 있다

이때인가

여인아

그대만이 이 나라의 신령이더냐

겨울이 왔노라고

한밤중

얼어붙은 고요

그 깊디깊은 하늘의 우물 속에서

떨어지는 기러기 울음소리

잠들어 다 듣고 있거라

잠들지 않고 듣고 있거라

그럴진대 바다 복판 멈출 줄 모르는 노도인들

어찌 바다가 운다고 하지 않겠느냐

아니 첩첩산중인들

사내들의 잠든 깃발인들 다시 펄럭대며

어찌 바람이 운다고 하지 않겠느냐

바람이 분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이렇게 우리는 떼지어 울어야 했다

떼지어

내놓아라

내놓아라 울부짖어

무쇠덩어리 녹여 앗 뜨거웠다

어디에 내가 있더냐

어디에 네가 있더냐

우리로서 갖가지 거짓을 물리쳐 울부짖어야 했다

천중으로 우레로 귀청 찢어지도록 꽹과리 징소리로

허나 어찌 우리만이겠느냐

제각각 목쉬어 돌아가면

거기 먼저 가서

고즈넉이 기다리고 있는 내가 있다

죽은 뒤에도

다시 일어서서

거기 나를 기다리고 있는 네가 있다

몇백 번이라도

짙푸른 피 뿜어내는 네가 있다

그러다가

사뭇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한 가지인 채

신새벽 쇠북이 울기 시작하면

다시 달려나와

웅성웅성 어둠 속 우리가 되었다

어디 지난 세월뿐이겠느냐

저기 비탈져 오는 미지의 세월마저

우리가 되어야 한다면

어찌 우리가 새로운 행렬의 금빛 우리가 아니겠느냐

개구리 울음소리

대낮 매미 울음소리와 더불어

가을밤 귀뚜라미소리와 더불어

기러기의 넋이 지나가는

그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울음소리의 진공과 더불어

하류

저 금강산 내금강 어디인 줄도 이제 모릅니다

저 태백 황지 한밤중

소쩍새소리 시냇물이 어디인 줄도 모릅니다

퍽이나 많은 전생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북한강 남한강으로 각각 흘러오는 동안

그 눈 시리게 순결한 숫처녀는

세월의 여러 애옥살이 정로 잠겨

한 쉰 살쯤의 목쉰 묵은 여인이 되었습니다

흘러흘러

경기도 파주 오두산 드넓은 앞물에 이르렀습니다

저 대성산 오성산 백암산 이제 어디인 줄도 모릅니다

그렇게 여러 갈래 물들이 만나고 또 만나면서

한탄강 임진강으로 흘러오는 동안

그 생나무 타는 듯한 총각들은

세상의 여기저기 굽이쳐 오며

한 예순 살쯤의 반벙어리 늙은이가 되었습니다

망각속의 아슴푸레한 기억 하나둘 남았습니다

아사녀라 하였던가

아사달이었던가

그렇게 흘러흘러

여기 개성직활시 부근 조강리

비죽이 가슴 연 조강 앞물에 이르렀습니다

무엇 하나 연연할 줄 모르고

흘러온 한 생애 바쳐

다 왔습니다

다 왔습니다

그러나 거기 숙연히 서해 전체의 밀물이

가득히 들어와

어느 물이 어느 물인 줄 모르고

때마침 강화 문수산성 위 커다란 낙조로

온 세상을 울려 버리니

그 울음소리 속

누구의 옛 울음소리 하나둘도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저만치 아호비령 산맥이나 내각산 골짝에서

황해남북도 먼 길 쉬지 않고 흘러온

저문 예성강물이었습니다

지그시 세상살이 그림자들 스며든 말없는 얼굴이었습니다

그렇게 두 강물

세 강물로 만나는 울음소리였고

저 난바다 어디쯤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도

아득히 와 있었습니다

하류는 위대합니다

해 지는 강화도 언저리 마구 목메어

그 장절하디 장절한 울음소리들과 더불어

서쪽 바다 쪽으로

더딘 슬픔인 듯 조금씩 떠내려갑니다

예감은 하루의 끝에서 고통 다음으로 적중합니다

연평도 지나

하늘 밑 대청 소청도 지나

백령도 쪽에서도

아니 저 머나먼 장산곶 밖 인당수 쪽에서도

어서 오라고

어서 오라고 한사코 손짓합니다

방금 밀물이 썰물로 바뀌는 때

떠내려가는 두 물 세 물과 함께

무슨 영문 모르고

떠내려가는 한반도 중부 땅덩어리 커다란

울음소리를 맞이하고자

모든 물마루들 치솟아

돛폭 팽팽하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모든 충만으로

방금 운명이 움명을 낳았습니다

하류와

하류 이후는 어쩔 수 없이 위대합니다

고은 시인은 위 시 외에 여러편의 시를 읊퍼주어 함께한 청중들과 공감하는 자리가되었다.

“시 ‘하류’는 우리나라 장래의 시대적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고 설명하며, 그 흥분을 가라 앉치며 몸으로 읊프는 시는 한강넘어 강화도 낙조처럼 장열하게 표현되었다.

고은 시는 구성이나 문장이 규격화 되어있진 않으나 그 흐름속에서 스스로 규율이 만드어져 독자들을 단도리한다.

따라서 독자는 시로부터 자연스래 스스로 단도리 당함을 감내하며 그 쾌감을 느끼게 하여 오묘한 마력이 온몸으로 전달되어지게 한다.

 

이것은 한국의 자연이 그러하듯 한핏줄인 우리민족이 하나임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 짜릿한 상징의 주체성이 세계를 감동시킬 수 있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시인 고은임이 보여지는 것이다.

 

고은 시인은 말한다.

“1958년 가을, 아직도 총소리와 포소리가 들리는 듯한 휴전 뒤의 남한에서 시인으로 공인되었다. 25세였다.

1930년대 식민지시기 시인 20여 명 이래 시인 1백 명 중의 하나였다.

 

무엇 하나 가지지 않은 빈손이었다. '빈손인데 호미가 들려 있구나'라는 선가(禪家)의 말은 정작 그 뒤였다.

여벌옷 한 벌밖에 없는 풋풋한 젊은 승려였다. 본디 화가가 될 것을 꿈꾸고 있었는데 전쟁의 소용돌이는 그런 꿈을 없애 주는 대신 몇 편인가 자기 모순과도 같은 시를 습작하게 만드는 음습한 가능성이 있었다.

 

거듭된 폭격으로 파괴된 고향의 항구는 폐허 그대로 방치된 채였다. 그곳에서 나는 화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화가 나병재와 친구가 되었다. 나는 그에게서 색채와 앙포르멜을 익혔고 그는 나의 비유에 전염되었다.

 

나는 전쟁의 광기가 휩쓴 뒤의 고향을 떠났다. 좌우익 보복학살의 썩은 사체더미 참변의 현장인 고향은 더 이상 내 호흡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막 발족된 전후 한국시인협회 기관지《현대시》창간호에 신인작품 <폐결핵>이 조지훈의 선정으로 게재되었다. 친구 나병재가 나도 모르게 그 원고를 보냈던 것이다.

 

그 뒤 나는 산중에서 서울에 갔다. 서울의 비구승단(比丘僧團) 대변인으로서 신문을 창간했다. 서투른 편집으로 지면에 빈칸이 생기기 일쑤였는데, 그 빈칸에 내 시편을 채워 넣기도 했다. 그것이 눈에 띄어 나는 서정주에게 소개되었고 서정주는 내 시 5편 중 3편을 한꺼번에 추천 완료했다.”

고은 시인에 대하여 고 리영희님은 “그 많은 시인들과 알게 되고 사귀는 과정에서 언제나 나의 앞에 '경이'로 나타나는 것이 고은이다.

그에게는 도대체 일체의 인용이 아무런 힘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만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싶을 만큼 자유이고 그저 자기 자신이다.”

 

송기숙님은 “도대체 고은은 상상력도 엄청나지만 시적 식성은 더 무지막지하다. 소는 풀만 먹고 호랑이와 독수리는 짐승만 먹고 불가사리도 쇠붙이만 먹는데, 그는 풀이고 짐승이고 쇠붙이고 돌멩이고 통나무고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고 날아다니며 닥치는대로 먹어치운다 그 잡식성으로 걸터듬은 먹이가 그의 역사적 상상력의 용광로에 들어가면 금반지도 되어 나오고 비단도 되어 나오고 화살도 화염병도 되어 나온다. 길가에 딍구는 조약돌이나 장독대에 구르는 낙엽이야 말할 것도 없고, 길바닥에 동전이라도 하나 떨어졌다 하면 그 임자와 돈의 내력을 좇아 그의 상상력은 구멍가게로 공장으로 임투현장으로 천방지축 앵앵 순식간에 이 땅 구석구석을 종횡으로 몇 바퀴 돌 터이다.

그의 기억력이나 상상력은 타고난 것이라 치더라도, 민족정신을 꿰뚫는 역사의식과 인생에 대한 통찰은 그냥 허두루 향성된 것이 아니다. 그 생애 자체가 끝없는 탐구와 모색과 번민과 모험으로 점철된 한 편의 흥미롭고 처절한 장편이며, 그의 문학과 현실적 행위로의 불 같은 실천은 모두가 생애를 건 엄중한 역사행위이고 그런 태도는 그의 기나긴 인생역정을 통해서 탄탄하게 형성된 것이다.”

 

또한 백낙청님은 “거의 반세기에 걸친 고은의 기존 작업만으로도 그가 우리 문학사에 우뚝한 존재가 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은 그것대로 중요하다. 훌륭한 작품을 풍성한 분량으로 써낸다는 것은 대시인의 필요조건의 하나인데, 그 점에서 고은은 정지용, 백석, 김수영이나 신동엽 같은 애석한 이름들과 구별된다. 아니, 장수와 다작의 시작으로 곧잘 칭송되는 미당 서정주를 쉽게 넘어선다.

근작 '사과꽃'을 예로 보더라도 김수영보다 덜 난해하다 뿐이지 그 사상이나 가락 모두 김수영과 통할지언정 서정주로서는 근접할 수 없는 경지이다.”

신경림 작가는 “흔히 고은의 문학을 큰 산에 비유한다. 옳은 말이다. 시만 보아도 그러해서 가령 그의 시를 읽는 맛은 큰 산을 더듬는 것 같다는 표현보다 더 적절한 말도 드물리라. 그의 시는 높은 산봉우리인가 하면 문득 깊은 골짜기다. 가파른 벼랑이 되어 가까이 오는 것을 밀어내다가도 밋밋한 산비알이 되어 오는 사람을 따스하게 감싸안는다. 때로는 바위로 곧추서서 하늘을 향해 칼질을 하지만, 또 때로는 산자락에 질펀하게 누워 온갖 게으름을 피우는 재미도 놓치지 않는다.

 

어깨와 겨드랑이에는 호랑이와 늑대 따위 맹수를 기르면서도 사타구니와 발치에는 잡벌레가 들끓게 내버려둔다. 어떤 곳은 대낮같이 밝고 또 어떤 곳은 밤중처럼 어둡다. 이쪽에서 아름답고 화려한 꽃들이 잔뜩 피어 가지껏 뽐내고 있는가 하면 저쪽에서는 못나고 보잘것없는 잡풀들이 고개를 꼬고 엎드려 있다. 말하자면 이것이 고은의 시다. 그러나 큰 산에 비유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일초의 시는 크기도 하거니와 빠르기 때문이다. 사슴처럼 날렵하고 발빠른 점이 고은 시의 또하나의 미덕이기도 하다.

 

고은의 시는 한 곳에 못박혀 있지 않다. 어느 외진 시골마을에서 농사꾼의 벗이 되어 서성거리고 있는가 하면, 공장지대 한복판에 뛰어들어 노동자의 대열에 서서 어깨동무하고 내달린다. 질척거리는 뒷골목에서 술취한 부랑자와 동무하고 있다가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종소리가 되어 울려퍼진다.

 

큰 배의 우렁찬 기적소리가 되어 억센 파도를 넘어가기도 하고, 협귀열차의 삐걱거리는 바퀴소리가 되어 쓸쓸히 산모롱이를 돌기도 한다. 바다에 가 있는가 싶으면 산에 가 있고, 산에 가 있는가 싶으면 장바닥에 가 있다. 주막에 한가롭게 누워있는 것 같다가도 느닷없이 길거리를 내달리고, 땅바닥을 어슬렁거리다가도 훨훨 높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고은의 시를 정확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체로 크고 깊은 산 어느 한구석을 더듬었을 뿐일 터이리라. 더욱이, 이것이 고은의 시다 싶을 때는 그는 훌쩍 날아 먼곳으로 달아나 있을 때다. 다시 땀을 뻘뻘 흘리며 쫓아가 겨우 옷깃을 잡으면 그는 어느새 빠져나가 더 멀리 달아난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곱새기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의 시의 발자국은 너무 넓고 너무 길다. 놀라운 것은 이것이 바로 그의 삶의 궤적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의 시가 이토록 크고 넓고 깊은 것은 그가 그만큼 크고 넓고 깊은 삶을 산데 연유한다는 얘기다. 다 아는 터이지만 그는 가장 치열한 삶을 살았다. 군사독재와의 싸움에서도 또 통일운동, 변혁운동에서도 그는 한번도 뒤에 선 일이 없다. 그러나 이것만이 그의 삶의 전부는 아니었다.

 

분명한 것은 그는 결코 한 곳에 못박혀 사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저 앞을 가고 있구나 싶어 쫓아가보며 어느새 저만큼 성큼성큼 앞질러 달려가고, 그래서 다시 헐레벌떡 쫓아가면 시치미를 떼고 우두커니 서서 짐짓 딴전을 피우기도 하는 것이 고은이었다.

 

한편 그의 시가 사슴처럼 빠른 것은 그가 세상의 낡은 관념에 빠져 있기를 늘 거부하는 데서 오는, 그가 지금까지 해온 일에 대해서 세상이 그에게 준 명예와 안락까지 거부하고 있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점도 허투루 보아서는 안될 터이다.

 

고은은 물론 시인이다. 그것도 큰 시인이다. 그러나 시인이라는 범주만 가지고는 그의 문학을 다 말하지 못한다. 시에 맞먹을 만큼의 많은 소설, 평론, 에쎄이 등의 산문을 썼기 때문이다. 어쩌면 장르라는 개념이 그에게는 무의미했는지 모른다. 그의 거칠 것 없고 거리낌 없는 발걸음이 장르의 벽 따위 쉽사리 넘나들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소설, 평론, 에쎄이가 시인의 여기(餘技)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각각 일가를 이룬 이의 그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그의 소설이나 평론을 읽고 시에서보다 더 깊은 감동을 받았다거나 더 크게 고무되었다는 고백은 독자들한테서 흔히 듣는 터... 그의 문학이 우리 문학이 도달한 가장 높은 봉오리의 하나임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고은 시인이 말하는 그의 년보는

“1933

8월 1일(호적에는 4월 1일로 잘못 등재됨) 군산시 미룡동 138번지(그 당시는 전북 옥구군 미면 미룡리 용둔부락)에서 아버지 고근식(高根植) 어머니 최점례(崔點禮)의 장남으로 태어남(음력 6월 10일 아침 10시). 본명 은태(銀泰).

1950년의 6·25 전쟁 중에 이름의 끝자는 떼어내고 은(銀)이라고 자칭한 이래 오늘에 이름.

어린 시절은 <암사내>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 이는 사람들을 보면 유난히 부끄러움을 탔기 때문. 당숙이 집에 와도 두 손바닥으로 새빨개지는 낯을 덮고 있다가 도망치기 일쑤였음.

중농(中農)과 빈농(貧農)의 변전이 심한 가운(家運). 9세까지 이 마을 저 마을의 서당을 전전하며. 백수문(白首文)부터 동몽선습, 소학, 논어 등을 익혔음.

 

1943

미룡국민학교 입학. 그해부터 조선어 교과과목이 폐지되어 일본어만으로 수업. 그러나 마을 머슴 대길이 아저씨로부터 <언문>을 배웠으므로 탄금대인(彈琴台人)의《의지할 곳 업난 청춘》을 주룩주룩 읽다가 종조부한테 혼나기도 했고, 신식 연애소설 따위를 마을 아저씨들을 통해서 빌려다가 탐독. 일본 이름 다까바야시 도라스께(高林虎助).

3학년 때 일본인 교장 아베(安部)가 장차 무엇이 되겠는가 하고 물었을 때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이 육군대장 해군대장이, 또 여학생은 간호부가 되겠다 했는데 나는 천황이 되겠다고 해서 그 때문에 천황모독죄의 퇴학처분을 간신히 넘기는 대신 3개월 동안 하루 3시간씩 썩은 보리에서 덜 썩은 보리를 가려내는 악취 속의 강제 작업을 했음. 고독을 체험.

그림과 작문에 재미가 생겨났음. 이 무렵의 마을 동무 이관전.

 

1945

8·15해방으로 월반(越班), 단번에 동급생이 하급생이 되어서, 허약체질로 주눅이 든 처지에서 해방되었음. 학교 친구 문수원, 고근상 등.

해방 직후 새로 부임한 권모(權某) 교장이 친일파라 해서 교내 동맹휴학을 하는데 주모자의 하나로 되었음. 최칠봉, 고재영 교사의 사랑을 받음.

1년 뒤 신설된 군산 사범학교 입학시험에서는 성적은 단연 우수 했으나 동맹휴학사건 때문에 품행문제로 불합격 처분을 받고 다음해 군산중학교에 5백 명 중 수석으로 입학. 그러나 이후 공부를 싫어하고 선생을 무시했음. 급장 부급장 따위를 내놓고 미술부에 들어가 교내전에서 1등상을 받기도 했음.

어느 날 저녁 10리길의 학교와 집 사이의 길에서 시집《한하운시초(韓何雲詩抄)》를 습득, 그 시집을 밤새도록 읽고 가슴이 찢어 질 것 같은 문학적 충격을 받음.

이광수, 노자영 등을 열심히 읽기 시작함. 몇 번 출분(出奔)했으나 그때마다 아버지한테 잡혀서 집으로 돌아왔음.

해방 직후에는 특히 반탁(反託) 동맹휴학, 단정(單政)반대 동맹 휴학을 즐기고, 새벽에 상급생의 지시에 의한 벽보 붙이기 심부름 등에 참가했음. 강 건너 장항 제련소의 굴뚝에서 늘 영원감(永遠感)을 체험함.

 

1950

6·25전쟁으로 4학년 휴학. 이때부터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기 시작함. 3개월 동안 인공 치하. 밤에는 인민군의 명령으로 비행장 강제노동, 미군의 함포사격, 폭격 등으로 파손된 활주로 복구작업을 하고 낮에는 집에서 노동. 이때 한 마을의 선배 김기호와 함께 그는 효성(曉星) 나는 호성(湖星)이라는 호를 쓰며 시를 습작하기 시작했음.

9월 수복 전후 동족상잔의 참극에 의해서 정신착란 상태가 지속 되면서 그때까지의 농촌적 순결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함. 가출사건이 빈번해 짐.

1·4후퇴로 서해 선유도에 부산행의 피난선을 버리고 기착하여 멀미를 가라앉힌 이래 아버지와의 피난살이에서 문학 지망의 은사 김종숙(金鍾淑)과 함께 하루에도 몇 10편의 습작 시를 지음. 그 무렵까지의 시 원고를 정리하여 <아름다운 전설>이라고 이름 붙였으나 그 뒤의 입산(入山) 당시 불살라 버렸음.

피난에서 돌아와 군산의 미(美) 제21항만사령부 운수과 검수원, 군산 북중학교 국어 및 미술교사 (그 당시에는 교사 자격이 없이도 ×동(童) 운운해서 특채될 수 있었음) 따위를 하다가 옥구 대야(大野)에 가서 엿장수도 했음. 이병기, 신석정, 백양촌, 김수영 등을 만남.

자학증상이 깊었으며, 군산항에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일본인 항해사가 건져 냈음. 화장도 하고 다녔음. 두 귀에 청산가리를 넣어서 고막이 녹았으나 하나는 구제.

고향의 문사(文士) 전학배(田鶴培)?옥배(玉培) 형제에게 심취. 그들을 찾아가서 밤새 우는 일이 많았음. 학업 계속을 거부하여 가정불화. 지방의 선배 문인 목련(木蓮 宋基元)과 감격적으로 만남.

 

1952

불교 승려가 됨. 법명(法名) 일초(一超). 효봉(曉峰)스님의 상좌가 된 이래 12년 동안 수선(修禪)과 만행(萬行). 목포 유달산 암굴의 거지대장 수제자가 되어 거지 의발(衣鉢)을 전수받음. 구걸 행각에 한동안 몰입. 훨씬 뒤 청담(靑潭)스님과 함께 한 서울 등지에서의 탁발행각(托鉢行脚)도 이때 길들여짐.

 

1957

서울 선학원(禪學院)에 들어감. 불교 총무원 간부, 전등사 주지, 해인사 교무 및 주지 대리 등 역임.

《불교신문》을 이행원(崇山)과 함께 창간, 초대 주필이 되고 그 신문에 논설, 시문 등을 발표함.

 

1958

시 <폐결핵>을 친구인 나병재(羅丙哉)가 투고해서 조지훈 등의 천거로 한국시인협회 기관지 <현대시>에 발표되면서 시단에 나옴.

이어서 <봄밤의 말씀> <눈길> <천은사운泉隱寺韻> 등이 서정주의 단회(單回) 추천으로 발표되었음. 구자운, 박희진, 박재삼, 이형기, 김관식 등과 친교. 화단의 신인 김창렬, 나병재, 김서봉, 안상철, 하인두, 박서보, 등과도 교류, 박고석, 전봉초 등과도 자주 만남. 친구인 시인 백종구, 화가 나병재의 결혼 주례를 비롯, 승려 시대의 결혼 주례가 1백여 회.

비가 오면 조계사 마당에서 벌거숭이로 뛰놀았는데 그럴 때는 다른 승려들도 벌거숭이로 따라나섰음.

 

1959

첫 시집《불나비》40편의 시가 인쇄 도중 화재로 전소되어 작품을 다 잃었음.

해인사에서 단식 21일, 용맹정진의 수행이 잦았음.

첼리스트 조현진(趙顯瑨)과 친숙.

 

1960

시집《피안감성彼岸感性》출간. 해인사 승려 혜정(慧淨)과 대구의 독일어 교사였던 시인 송영택이 시집 출판에 도움이 되었음. 오상순(吳相淳)과 동숙. 전후문협(戰後文協) 결성에 참가.

 

1961

장편소설《피안앵彼岸櫻》출간.

《반야심경해의般若心經解義》《불교의 길》(선학원) 출간, 각각 등사본.

전국승려대회 지도위원, 중진회의 등을 탈퇴하고 평 승려로 돌아감. 도우회(道友會) 회장 피선. 그러나 교단 혁신운동을 위한 청년 승려 단합을 서두르다가 그것이 단순한 종정 하야(下野)를 위한 음모로 오판되어 징계회의에 회부되기도 함.

강연 행각. 이때부터 10여 년간 '가짜 고은'이 전국 각 지역에 출몰함.

 

1962

한국일보에 환속선언을 발표하고 환속, 그동안 품수(稟受)한 대덕법계(大德法階)를 반환. 중생제도에 대한 환상이 강해서 그 때문에 현실에서의 좌절이 몇 번 있었음.

숄로호프의 소설을 읽고 충격을 받아서 그동안 써둔 원고들을 불질러 버리고 절망에 빠짐.

폭음의 주란(酒亂)과 퇴폐. '가짜 고은'도 환속한 세속인 차림으로 고은 행세를 하고 다녔는데 경주, 김천 등지에서는 한글 백일장 심사위원장, 한시대회(漢詩大會) 심사위원, 서울에서는 모대학 영문과 졸업반인 여대생과 결혼하고, 제주도에서도 충남대 가정과(?) 출신의 여자와 동거하는가 하면, 계룡산에서는 공주지방의 문학청년들의 추앙을 받으며 금품 수취도 일삼으며, 각종 사기행각을 함. 이 때문에 본인에게 피해가 막대했음. 5여 년 뒤에 하나는 제주도에서 체포되고 다른 하나는 10여 년 뒤에 서울에서 경찰과 합동으로 체포하여 훈방.

《세계전후문제작품집 - 한국전후문제시집》에 <고은집高銀集>을 수록. 구상(具常)과 친교.

 

1963-66

제주도 기류. 처음에는 제주해협에서 투신자살을 뜻했으나 만취한 상태에서 자살이 포기됨.

제주시 화북동에 도서관을 설치하고 금강고등공민학교를 개교, 교장 겸 국어 미술 교사로 있으면서 무료수업으로 3년간 1회 졸업생까지 배출. 폭음. 어느 때는 만 3일을 자지 않고 마시기도 했고 술취해서 공동묘지에서 잔 일도 허다함. 최현식, 김종철, 이영복, 문성선, 박만영 들이 그때의 벗.

장시 <니르바나> 발표. 서울의 김수영(金洙暎)이 자주 격려를 함. 불면증 심각, 허무주의에 침윤, 반주로 소주 4홉짜리 한 병이 거의 다반사. 바지란 바지는 다 가위로 잘라서 반바지를 만들어 입고 다님. 서울의 신동문(辛東門)이 늘 보살펴 주었음.

서귀포와 마라도에 사로 잡힘. 한라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가까스로 구조됨. 김현 등이 찾아옴.

시집《해변의 운문집》출간.

 

1967

서울행을 결심, 15일 동안 송별회 술을 마시고 제주도를 떠남. 민음사 박맹호와 만남. 윤호영의 도움으로 홍릉에서 기거.

수필집《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 시집《신, 언어의 마을》 출간.

민음사, 신구문화사의 편집실에서 생활. 신동문의 술을 최인훈, 염무웅, 김현 등과 자주 마심.

 

1968

수필집《G선상의 노을》,《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출간.

한국 뮤지컬 대본 <한강>집필 - 예그린 악단의 공연 제목은<정이 흐르네>.

《세대(世代)》에 연재·기고를 자주 했고, 이광훈, 이중한, 권영빈 등이 내 글을 게재하기 좋아했음.

 

1969

정릉으로 이사. 화가 박고석 등과 친교.

자취와 매식, 폭음·만작(晩酌)의 주벽.《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절망의 메시지》 출간. 장시 <사형(死刑)>(大日蝕 改題).

동화통신 부장대우로 취임, 이것이 유일한 직장생활. 외신기자 구락부 살롱을 취중 난동으로 파손시켜서 그 일로 바로 사직, 저술에 전념.

 

1970

단시집(短詩集)《세노야》출간. 신민당 대통령후보의 신문 발표용 선언문 초안 청탁이 송원영(宋元英) 측으로부터 문공부 차관직 제시로 있었는데 사절.

정교하게 추진한 음독자살이 정릉 골짜기 취약지구 예비군 특훈 때문에 의식불명의 신체가 발각되어 경찰에 의해 입원, 만 30시간 만에 의식 회복. 장기간 치료 및 휴양.

아버지 병사(病死)로 20여 년 만에 밤중에 고향에 감.

노동자 전태일(全泰壹)의 분신자결로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

 

1971

연희동으로 이사. 수필집《한 시대가 가고 있다》 출간.

송지영, 남재희,《문학과지성》편집 동인 등과 술을 자주 마심.

 

1972

《1950년대》제1권 출간. <노래의 사회사(社會史)>를 한국일보에 연재.

 

1973

화곡동 46-308로 이사. 이 이사 이후 이른바 허무주의의 대표자라는 딱지를 떼어내고 역사의식의 출발이 실현됨. 박정권 3선 개헌반대 운동의 첫 단계인 개헌청원 운동에 문인대표로 참가. 백낙청 등과 동반하기 시작함.

세칭 문인 간첩단사건 구명운동을 주도하고 민청학련사건의 김지하 석방운동도 개시함.《이중섭평전》을《신동아》에 연재, 출간(영화화). 중편《파계(破戒)》영화화.

 

1974

작가의 사회적·역사적 책무를 절감,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백낙청, 이문구, 박태순, 염무웅, 이시영, 송기원, 조태일, 황석영, 신경림, 장용학, 등과 결성, 초대 대표간사로 활약. 제1차 선언문 발표. 데모 중 체포됨. <민주회복국민회의>에 문인대표로 김병걸, 백낙청 등과 참가. 이때부터 경찰서, 정보부의 고객이되어 유폐되는 일이 다번 했음.

시집《문의文義마을에 가서》. 장편소설《일식日蝕》(영화화 됨)을 출간,《이상평전》을《세대》에 연재, 출간. 장편소설《어린 나그네》를 《독서신문》에 연재, 출간.《고사편력(古寺遍歷)-나의 방랑放浪 나의 산하山河》출간. 편역서 《당시선》, 《두시언해》 출간.

대학에 출강하기 시작한 이상화(李相華)와 만남.

제1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동아 자유언론투위와 동조, 동아일보지광고의 격려광고 운동에 박차를 가함.

강연, 선언문 낭독 등에 의해 당국에 연행, 장기구금. 전담형사 및 정보부 기관원의 24시간 감시·동침·동행이 계속됨. 심지어 친지의 결혼식에 갈 때도 동행하고 술집에도 함께 가서 앉아야 했음.

서울대생 김상진 추도식 때문에 명동 수녀원에 피신, 끝내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추도식을 함세 웅신부 등과 개최.

 

1975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선포로 일단 칩거당함. 한동안 절필(絶筆)하다가 집필 재개. 이 1년 동안 소주 1천 병을 통음(이 계산은 이문구가 해주었음).《서울평론》에 연재했던《한용운평전》 출간.《세대》에 연재한《제주도》 출간. 민음사의<오늘의 시인선>의 고은시선《부활復活》 출간. 역주《초사(楚辭)》출간. 이남덕, 이효재, 박순경, 이종복, 권영빈, 강운구, 등과 설악산에서 자주 만남.

 

1976

지학순, 김승훈, 함세웅,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등과 <김지하 구출위원회>를 결성, 부위원장으로 석방운동 개시.

이우정 등과 동일방직사건에 대한 대책위원회, 상고사 대책위, 원풍모방 대책위, 전태일과 청계피복사태 문제 등에 참가하여 노동 운동에 입문. 제품 불매운동, 단식투쟁, 시위와 노동시 낭독, 선언문 발표 등으로 여념이 없었음.

오늘의 산문선집《환멸을 위하여》출간. 역주《시경(詩經)》출간.《한국의 지식인》출간. <불교란 무엇인가>를《법륜(法輪)》에 연재. <시와 시대>를 《독서신문》에 연재. 역주《두보시선(杜甫詩選)》 출간. 동화《갠지스 강의 저녁놀》출간.

 

1977

시집《입산(入山)》출간. 소설집《밤 주막》출간. 수필집

《세속의 길》출간. 오늘의 사상신서《역사와 더불어 비애와 더불어》출간. 장편소설 《피안앵》을 개작,《산산이 부서진 이름》으로 출간. 민주구국헌장사건 주모자로 약 1개월 동안 정보부의 지하실에 구속, 그 뒤로 송광사에 유폐당함.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조태일과 함께 서울구치소에 수감. 구속 취하로 석방. 선임 변호사 김강영, 홍성우, 황인철 등. 나의 인세 및 가계 등의 관리를 담당형사가 맡음. 황숙자가 옥바라지. 출옥 뒤 자유실천문협 제3주년을 계기로 문학운동 확대를 위한 선언문 발표. 《대화》에 장시 <대륙大陸> 연재.

 

1978

<민주청년협의회>를 화곡동 자택에서 결성 지도, 윤보선, 문익환, 박형규, 성내운, 천관우, 송건호, 백기완 등과 고문이 됨. 민주통일 원칙 및 방안의 모색. 광주 서울 부산 등지의 많은 강연, 그 중에서 KSCF주최 4·19기념강연은 열렬한 반응.

자유실천문협과 백범사상연구소 공동주최로 '민족문학의 밤'을 개최, 성대한 운동이 되었음. 개회사 및 <갯비나리>를 친지 백기완 등이 특별낭송. 외유와 국회의원, 장관 등의 유혹과 협박 심각.

8·15를 맞아 유신체제에 대한 항의삭발. 다시 평화시장 남영나일론 해태제과 등의 노사문제와 동일, 상고, 원풍 등의 사태에 대한 대책문제로 노동 현장에 접근.

이 무렵 <똥> <쪼까니 딸들에게> <열다섯 살의 노동자 바우에게> <전태일> <장준하> 등의 근로자 격려시를 각 집회에서 발표. 이 때문에 당국의 제재가 있었음.

원주 집회사건으로 구금. 집은 늘 찾아오는 젊은이들로 메워짐.

한국인권운동협의회 발족, 송건호 등과 함께 그 부회장에 피임.

산문집《사랑을 위하여》, 《가난한 이를 위하여》, 평론집《진실을 위하여》출간. 민중연구 모임에 참가(서남동, 백낙청, 박현채, 김용복, 서인석, 현영학, 김윤수, 구중서). 일제잔재 청산, 분단극복을 지향하는 새로운 문학운동을 제기함.

시집《새벽길》 출간.

 

1979

평론집《지평선으로 가는 고행苦行》출간. 《한국문학전집 - 고은집》 출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약칭 국민연합) 결성, <민주회복국민회의>와 <한국인권운동협의회>의 지도층을 잇는 새로운 재야운동의 총본산이 실현됨. 함석헌, 김대중, 문익환, 이문영, 함세웅, 박형규, 이우정 등과 함께 참여, 문익환, 함세웅과 함께 중앙상임위 부위원장으로 핵심 역할을 함. 각종 인권문제에 대응. 집에서 세수할 겨를도 없을 때가 많았음.

이상화 영국 런던대 대학원으로 떠남.

YWCA에서 10일간 민족문학 특강. 《실천문학》창간 주도.

미 대통령 카터 방한 반대 데모 주도, 구속.

YH사태에 문동환, 이문영 등과 함께 대책 수립, 농성현장을 격려·지도. 신민당 총재 김영삼에게 여공들의 문제를 협의, 적극 찬동을 얻음. YH 김경숙 양 신민당사에서 절명. 국가보위에 관한 특조법 위반으로 문·이 등과 함께 서울구치소에 투옥. 선임 변호사 홍남순, 이돈명, 홍성우, 황인철, 박한상, 박세경, 등. 집은 오종우가 맡아줌. 옥중에서 10·26사태를 만남. 연말에 보석 형식으로 출감. 노동운동을 결심하고 하루 두 갑짜리 담배를 끊음. 감옥에서 귀의 고막 파열로 청각을 잃어서 그 때문에 귀와 코의 수술. 서울대 의대 김종선(金宗善) 집도.

 

1980

계엄하에 작품발표 엄금됨. 국민연합운동 적극화. 이때 한두번 작품발표를 위해서 '무단(舞丹)'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음. 소설집《산 너머 산 너머 벅찬 아픔이거라》출간. 대학신문들의 청탁에 호응. 출옥 직후 영등포에 노동학교 설립, 교장이 됨. 김대중, 문익환, 문동환 ,이문영, 이우정, 서인석, 서남동, 김종철, 정연주, 이돈명, 홍성우, 김용복, 한완상, 김찬국, 장기표, 신혜수, 서경석, 임명진 등이 주요 초빙 강사. 각 대학 강연.

5월 이후 내란음모죄, 계엄법, 계엄교사 죄목으로 조사, 재판. 문익환, 이문,영 예춘호 등과 육군교도소에 구속됨. 죽음 직전의 극한 상황 체험. 군법회의에서 20년 선고 받음.

 

1981

대구교도소 특별요시찰 정치범 수용 중 서울구치소로 이송되어 통합병원에서 파견된 김종선에 의해 다시 귀 수술, 위기를 넘김. 양복순과 친지들이 집을 맡았음.

 

1982

8·15기념으로 가석방. 국민연합 동참 예춘호를 비롯 성내운, 박태순, 염무웅, 김종철 등이 대구에 와서 내 신병을 인수.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한 건강상태였음. 여러 번의 옥중 단식으로 인한 악성 위궤양, 과민성 대장염 치료. 삭발 철회. 당분간 강연 불응.

 

1983

친구인 의사 장홍주의 시술로 어머니 양성종양 수술. 3년 만에 시를 발표. <조국의 별> <온돌>(세계의 문학) <4월혁명론> 발표. <함석헌 전집> 편집위원.

5월 5일 이상화와 결혼. 풍운의 독거생활을 끝냄. 식장은 수유동 안병무 교수 자택 정원. 주례 함석헌, 축도 문재린, 축시 문익환, 축사 이문영. 백낙청, 집전 리영희 교수 등으로 극히 제한된 친지 1 백여 명만을 초청함. 정보기관에서도 당일에야 알고 달려왔음.

아내는 결혼으로 대학 당국에서 면직 여부 대상이 되었으나 대학 담당 안기부 직원의 권고로 무사하게 넘어갔음.

결혼 직후 고려대 이문영 교수가 소개한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에 주거를 정함.

4년 만의 첫 강연 <민족통일의 역사적 과제>. 시를 잇달아 발표함.《고은 시전집》1, 2권 출간. 출판기념회를 준비가 당국에 의해서 제지당함. <자유실천문인협의회> 10주년을 맞아 재창립, 후진에게 물려줌. 일본의 반핵평화운동대회의 초청이 있었으나 출국불허.

미국 기독교 기관에서 초청이 있었으나 출국불허. 연금이 다시 계속됨.

 

1984

김재준, 함석헌, 안병무, 박형규 등과 재야간담회 구성 실무를 맡음. 민통련 지도위원직 등은 자동적인 것임.

시집 《조국의 별》출간.

 

1985

서사시 <백두산>을 계간지《실천문학》에 연재하다가 강제 폐간당함. 창작과비평사 출판사 등록 취소에 맞서 투쟁. 월간 《마당》에 <겨레와 노래> <어린 시절>을 연재.

딸 차령이 태어남. 5월 12일.

미국 일본 등지의 초청여행 불허됨.

 

1986

<만인보(萬人譜)>를《세계의 문학》에 연재함. 전작으로 옮겨 1, 2권을 출간.《창작과비평》강제폐간 뒤 이름을《창작사》로 연명할 때였음. 시집 《전원시편》,《시여 날아가라》,《가야 할 사람》, 평론집《문학과 민족》출간. 산문집《고난의 꽃》출간.

일본 펜클럽과 서독 하이델베르크대 등지의 2개 대학 강연 초청이 있었으나 여권이 발급되지 않음. 당국에 의한 연금상태 자주 있었음. 집 주위는 항상 사복 경찰관 수명이 감시. 제13회 한국문학작 가상 수상식에도 연금에 동원된 경찰 중 3명과 함께 동행하여 상장만 받고 바로 귀가 조치됨.

 

1987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상임공동대표(박형규, 김승훈, 이돈명 등과). 6월 항쟁에 적극 참여. 최루탄가스로 흉통이 잦았음. 동대문, 세운상가 그리고 서울역 광장 시위에 참가하였음.

박종철, 이한열 군 추도회 주관하고 추도시 낭독. 서울 시청앞 광장 2백만 시민집회에 앞장섰으나 그것을 청와대로까지 이끌지 못했음. 이른바 대통령 직선제의 6·29선언에 이렇다 할 정치적 대응없이 대통령선거 국면을 맞았음. 재야가 여러 갈래로 찢어지는 것을 보고 비애. 저술에 몰두함. 대학 등 강연 계속.

당국으로부터 완전봉쇄의 연금조치를 자주 당하고 어느 때는 사전에 이를 피해서 떠돌이 생활로 보내기도 했음.

버클리대 초청으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강연과 여행 2개월(1회용 임시 여권을 발급받아). 그러나 일본의 국제평화대회 초청에는 정작 일본 정부로부터 배일(排日) 사상가로 낙인 찍혀 비자를 받지 못했음.

대하장편서사시《백두산》시작, 1, 2권 출간.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해체하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 회장 김정한, 백낙청과 함께 부회장이 됨.

《만인보》3, 4, 5권. 출간.

 

1988

《만인보》6권, 시집《네 눈동자》, 《나의 저녁》, 《그 날의 대행진》, 평론 《잎은 피어 청산 되네》출간. 《고은전집》1, 2, 3, 4권을 출간하면서 매월 2권씩 계속해서 간행함.

제3회 '만해문학상' 수상.

여덟 번째 초청인 일본 이와나미(岩波) 출판사 초청이 당국의 출불허로 또 막히고 함께 초청된 백낙청을 통해 강연 원고가 대독되었음.

다시 일본 초청을 받아 그곳 2백여 지식인과 작가들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강연과 대화를 계속함. 일본 사회당 당수 도이(土井) 위원장. 작가 오에(大江健三郞), 야스에(安江良介), 이회성(李恢成), 노마(野間宏) 등과 교유. 일본 TV의 취재 계획에 따라 오키나와 조선인 희생현장 참배.

 

1989

<남북작가회담 추진위원회>위원장에 피선, 남북작가회담 제안. 판문점 회담을 위해서 회담 대표와 동료들이 가다가 연행 되었음. 일단 귀가조치 뒤 다시 연행하여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시킴. 서울구치소. 국제펜클럽 등 여러 나라의 석방운동, 구속항의에 의해 2개월 만에 보석 석방되어 징역 1년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의 1심, 2심 재판이 진행됨.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창립, 초대 공동의장 피선으로 의장 수락연설. 해방 이후 처음으로 진보적 예술인의 결집체가 이루어졌음.

《만인보》 7, 8, 9권. 산문집 《고은통신》, 《얼마나 나는 들에서 들로 헤매었던가》 출간.

 

1990

시집《아침이슬》, 《천년의 울음이여 사랑이여: 백두산 서정 시편》,《눈물을 위하여》. 평론집《황혼과 전위》출간. 납월북 예술가 산문집 전 3권 엮음.

민족문학작가회의 의장.

 

1991

민예총 의장 연임한 뒤 사임. 문학 저술활동.

시집 《해금강》, 《선시 - 뭐냐》, 《거리의 노래》, 《백두산》3, 4권, 장편소설《화엄경》출간.

<중앙문화대상>수상.

 

1992

호주 시드니대 한국학과에서 <한국문학의 오늘> 강연 및 호주 각 지역 여행.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 초청, <한반도의 꿈> 강연.

장선우 감독, 김형균 등과 인도, 네팔, 스리랑카 여행.

시집《내일의 노래》, 소설《그들의 벌판》,《내가 만든 사막》 출간.

 

1993

김영삼 정부에 의해 리영희 교수 등과 함께 사면 복권됨. 처음으로 복수여권을 발급받음.

미국 미시간대 국제대학 주관 국제대회에 리영희교수와 함께 강연.

경향신문사와 MBC 후원, 창비, 동아출판 협찬의 <시력詩歷 35년 고은 문학의 밤> 문학행사. 연강홀. 기념집 《고은문학앨범》(웅진) 출간.

경향신문에 자전소설 <나의 삶 나의 산하> 장기 연재, 광주일보에 <방랑시인> 연재.

서사시《백두산》후반부 5, 6, 7, 8권 출간. 시집《아직 가지 않은 길》, 에세이집《광야에서의 사색》, 여행기《인도기행》, 연구서《내가 가는 금강경》, 자서전《나, 고은》1, 2, 3권 출간.

아내 이상화, 딸 차령이와 함께 첫 유럽여행.

 

1994

경기대 대학원 석좌교수로 초빙됨 (1994-1998).

제1회 대산문학상 시부문 수상.

대하서사시《백두산》5, 6, 7권을 출간하면서 완성.

 

1995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초청 시낭독 및 강연.

프랑스 문화성 초청, 시낭송 및 문예지 고은특집.

시집《독도》. 소설 《정선아리랑》, 《소설 김삿갓》1, 2, 3권, 소설《선(禪)》1, 2권.

자서전《나의 청동시대》.

 

1996

호주 작가 페스티벌 참석. 고은 시선《아침이슬》영어판 출간. 시드니 TV 특집 프로 '한국시인 고은'에서 대담 및 시낭독.

일본 오사카 '중심 21' 초청강연 및 시낭독.

독일 주어캄프사 주최로 프랑크푸르트, 뮌헨, 베를린 등 5대 도시 순회 시낭독. 독일 주요신문들 인터뷰.

네덜란드 로테르담 국제시인대회 참석.

시집《어느 기념비》, 대하연작시《만인보》10, 11, 12권 출간.

 

1997

버클리대에서 미국 시인 게리 스나이더와 함께 시낭독. 버클리대에서 미국 계관시인 로버트 하스와 시낭독.

멕시코 <과달라하라 북페어> 문학행사에서 시낭독 및 인터뷰.

시집 《어느 기념비》,《만인보》13, 14, 15권 출간. 프레스 센터에서 창작과비평사 주최《만인보》15권 출판기념 '70년대 사람들' 행사.

산문집《살아있는 광장에 서서》, 동시집《차령이 노래》, 동화책《나는 시골 삽살개에요》

40일간 티베트 수미산 순례 중 어머니 별세(향년 84세).

 

1998

중앙일보 주관으로 북한 방문, 15일 간 북한 각지 문화와 자연 시찰. 북한에서 쓴 시를 분단 이후 최초로 팩스를 통해 직접 남한에 전달, 신문에 실림.

시집《속삭임》출간.

프랑스 정부 초청, 파리 <작가의 집>에서 미셀 드기, 알랭 주프르와와 시낭독, 이브 본느프와와 대담.

<산하여 나의 산하여:고은 시낭독회>가 예술의 전당에서 2일간 공연됨.

<만해대상> 시부문상 수상.

 

1999

미 하버드대 옌칭 연구교수 및 버클리대 방문교수로 가족과 함께 1년간 도미, 시론 강의.

한국 뮤지컬 대본 <백범 김구>집필.

하버드대 페인홀에서<고은의 밤>행사.

시카고대에서 미국 10대 시인의 하나로 시낭독 및 강연.

미 UCLA, 버클리대, 하와이대, 캐나다 요크대학, 캘거리 등지에서 강연과 시낭독.

뉴욕에서 '고은의 밤' 행사.

멕시코에서 파블로 네루다 기념 시낭독회 중남미 시인들과 참가.

시집《머나먼 길》, 북한여행기《산하여, 나의 산하여》, 시평론《시가 있는 아침》, 소설《수미산》1, 2권 출간.

 

2000

분단 55년 휴전 50년 만의 남북공존을 세계에 선포한 <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의 일원으로 방북, 기념만찬장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시를 낭독.

스웨덴 스톨홀름대 한국학 포럼 참석 및 <요테보리 도서전시회>에서 강연 및 시낭독.

미워쉬와 쉼보르스카야가 후원하는 폴란드 크라카우 세계시인축제에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망명시인 베이 다오와 함께 참가. 쉐이 머스 히니, 로버트 하스 등과 각종 시 행사에 참여.

시집《남과 북》,《히말라야 시편》출간.

제 1회 대산 국제문학제에서 기조연설.

 

2001

유네스코 주최로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세계 시인의 날'에 초대받아 아테네, 델피, 올림피아 등지에서 시낭 및 토론.

독일 브레멘 세계시인대회에서 시낭독 및 강연과 인터뷰.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열린 <세계 시 아카데미>창립대회에 회원으로 초청받음.

남미 콜롬비아 국제시인대회에 초청받아 각지 순회 시낭독.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동양박물관 초청강연 및 요테보리 국제 도서전 시 축제에서 시 낭독.

미국 시인 게리 스나이더 초청으로 UC 데이비스에서 시낭독 및 강연. UC 버클리와 UC 산타크루즈에서 시낭독 및 강연.

일본 도쿄 국제도서전시에서 후지와라 출판사의 포럼 발제자로 참가. 일본 5대 일간지와 인터뷰.

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대 초청, 시낭독 및 강연.

시집《순간의 꽃》, 수필집《길에는 먼저 간 사람의 자취가 있다》출간.

 

2002

체코 '프라하 작가 축제'에 초청받아 시낭독 및인터뷰, 현지 신문에 <시와 혁명> 기고.

러시아 바이칼 호수에서 열린 한국 문예창작학회 국제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 및 시낭독.

필리핀 마닐라에서 필리핀 문학예술센터가 주최한 제1회 '환태평양 시인축전'에 13개국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 발제 및 시낭독.

백낙청 편 고은시선《어느 바람》출간.

전 38권의 《고은접집》출간 (김영사)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총장의 초청으로 시낭독 및 문학강연.

프랑스 정부 초청의 한국문화축제 행사로 파리 몰리에르 극장 시낭독.

정부로부터 은관 문화훈장 받음.

시집《두고 온 시》, 《늦은 노래》, 《젊은 그들》출간.

 

2003

일본 오끼나와에서 열린 문학과 환경 국제회의에서 발제 및 미국 시인 게리 스나이더와 시낭독.

프랑스 빠리 제 7대학 동양학 연구소 주최 아시아 축제에서 시낭독, 강연 등.

이라크 한국군 파병 반대 작가 시위.

스웨덴 동양박물관 주최 현대한국문학 심포지엄에서 발제강연 및 시낭독.

일본 도쿄 국제 도서전의 한일 지식인 포럼에서 기조연설 및 기자회견 등.

만해재단 주최 국제평화시인대회 대회장으로 세계 20여개국에서 온 시인들의 문학축전을 금강산과 서울에서 진행.

제 3회 베를린 문학제에 초대받아 강연 및 시낭독.

군산에서 시비 '삶' 제막행사.

 

2004

<한국문학평화포럼> 회장.

미국 워싱턴의 폴저 쉐익스피어 도서관에서 시낭독, 하버드대학과 위싱턴대학에서 시낭독.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 여행.

스페인 살라망카대학에서 스페인 시인 안토니오 꼴리나스와 시낭독.

오페라 대본 <단군>(일명 개천<開天>) 집필.

스페인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만인보》 출간 기념 시낭독.

서울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고은 문학의 밤' 개최.

스페인 무르시아 세계시인대회와 꼬르도바 도서전에서 시낭독.

단재상 수상.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제 1회 한이문학포럼에서 강연 및 시낭독.

《만인보》16-20권 출간.

 

2005

한반도 분단 이후 최초의 한국어 공동사전 편찬을 위한<겨레말 남북 공동 편찬위원회>상임위원장에 취임.

독일 라이프치히 도서전에서 강연 및 시낭독.

일본의 마쓰야마대학과 고베 등 여러 도시에서 강연, 대답, 인터뷰 등.

장편 판소리 대본 <초혼(招魂)> 집필.

제 3회 베를린 세계 시인축제에서 대담, 시 낭독, 시 녹음 등.

노르웨이 몰데에서 열린 뵨슨문학제에서 강연, 시낭독, 인터뷰 등. 이어 오슬로 대학에서 강연과 시낭독.

독일 베를린문학제에 초대받아 강연과 시낭독.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주빈국 대표로 개막식의 '문학연설'을 하고 여러 행사에서 시낭독, 인터뷰 등.

노르웨이의 유일한 문화훈장인 뵨슨 문화훈장 받음.

 

2005

제 2회 대산 국제문학제에서 기조연설.

 

2006

<겨레말 남북 공동 편찬위원회>의 정례회의를 위해 수차례 북한 방문.

한반도 분단 이후 처음으로 북한 백두산에서 남북작가 300여명이 참가한 문학축제에 남측 대회장으로 시낭독.

이탈리아어판 《순간의 꽃》 출판 기념 시행사를 로마, 피렌체, 밀라노, 포르미아 등 4개 도시에서 개최, 여러 인터뷰와 시낭독.

프랑스 보르도대학과 빠리 도서전에서 강연 및 시낭독.

미국 여러 도시에서 영어판 시집 《삼거리 주막》 출판 기념 강연과 시낭독.

미국 PEN의 뉴욕 국제문학제에서 시낭독, 알렌 긴즈버그 50주기 기념식에서 시낭독.

이탈리아 빠르마 세계문학제에 초대받아 강연, 대화, 시낭독.

미국 제랄딘 다지 국제 시축전에 '특집시인'으로 초대받아 강연, 대화, 시낭독. 이어 하버드대학과 워싱턴대학에서 시낭독.

스웨덴의 문학상 시카다상 수상.

《만인보》 21-23권. 시집 《부끄러움 가득》 출간.

 

2007

몽고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제 1회 한몽 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 및 시낭독.

홍콩에서 개최된 국제 펜 아태지역회의의 특별손님으로 초대받아 시낭독.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ARCO 기념행사에서 인터뷰와 대담 및 시낭독, 말라가대학에서 강연과 시낭독.

서울대 초빙교수.

일본 도쿄에서 열린 <21세기 지식인>이 주최한 제2회 국제 콜로키엄에서 기조연설, 대담과 인터뷰 등.

일본 가나자와에서 개최된<문학과 환경학회>한일공동심포지엄에서 기조연설 및 시낭독.

영랑문학상 수상.

만해축전 대회장

한국에서 개최한 제1회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AALF)에서 기조연설 ‘나는 제 3세계라는 이름을 폐기한다.’

통일부 통일고문. 『겨레말큰사전』 남북편찬위원회 이사장으로 남북한에서 수차례 회의 주재.

노르웨이어판 선시 『뭐냐』 출간.

한러문학제에 참석, 모스코바 레닌도서관에서 시낭송.

북경과 상해에서 열린 한중문학제에서 강연 및 시낭송.

《만인보》 24-26권, 산문집《우주의 사투리》출간.

 

2008

독일 베를린의 세계문화의 집에서 열린 아시아문학제에서 시낭송과 대담.

괴팅겐, 에르푸르트, 라이프찌히에서 독일어판 시집 『바람 부는 날』 시낭송회.

영국 런던의 한국문화원 주최 첫 문학행사로 시낭송회.

캐나다 토론토에서 그리핀 문학상, 평생공로상 수상.

유심문학상 수상.

『인사이클로피디어 브리태니카』 2008년 연감에 등재됨.

만해국제문학제 대회장으로 기조연설.

시인 등단 50주년 기념 시집『허공』을 출판하고 첫 그림 전시회를 가짐.

50주년 기념행사는 9월부터 12월까지 많은 대담과 인터뷰, 중앙대, 경희대, 단국대, 서울대에서 포럼과 세미나, 서울, 대전 대구에서 기념 강연 및 시낭송회 등으로 이어짐. 축하행사의 하나로 주한 외국대사 10명이 10개국어로 ‘고은 시 낭송회’를 가짐.

예술원상 수상. 『겨레말큰사전』남북편찬위원회 이사장으로 계속 활동.

이라크와 이집트의 대표 주간문예지 『알 아디브』와 『알 아라비』에 시 특집.

단국대 석좌교수.

 

2009

마키즈 명사 사전(Marquis Who's Who)에 등재됨.

스페인에서 시 ‘어떤 기쁨’ 한 편의 원본과 번역본을 나무상자에 담은 한정본시집 출간.

『만인보』 마지막 4권 집필 완료.

시인 등단 50주년을 기념하는 시선집 『50년의 사춘기』(김형수편) 출간.

산문집 『개념의 숲』 과 『오늘도 걷는다』 출간.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개최된 국제 시축제에서 시낭송, 대담, 강연 등. 때 맞춰 출간된 폴란드어 시선집 『소나기』가 저명한 출판사 즈낙(Znak)에서 출간되어 현지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음.

이탈리아어 시선집 『노래섬』과 스페인어 시선집 『천년의 말라가』 출간.

 

2010

『만인보』의 마지막 4권을 출간하면서 1980년 감옥에서 구상한지 30년, 집필 을 시작한지 24년 만에 총 30권에 5600명의 이름을 올리면서 4001명을 노 래한 대하 인물시집을 완성함. 11권으로 된 특별 양장본 『만인보』 전집도 별 도로 출간. 출판 기념 ‘『만인보』 국제 심포지움’에 프랑스에서 시인과 학자가 참석해 발제와 발표를 했고 이어 대규모 출판기념식 열림. 미국의 전 계관시 인 로버트 하스는 “영어권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흥분하게 만드는 이 시집의 시들은 시인이 세계에 주는 선물이며, 그 모든 인간성과 폭력에 대한 기막힌 20세기의 초상이며, 한국 국민의 생명력에 바치는 찬사이다” 라는 축하 메시 지를 보내왔음.

『만인보』가 제 7회 광주비에날레의 주제로 선정되어 미국 『뉴욕 타임스』에 보도됨.

미국 동부의 스미스 컬리지와 로스앤젤레스의 UCLA대학 등지에서도 시낭송회, 인터뷰 등.

이탈리아 베니스 시 주최 국제 시 축제인 제 4회 ‘문화의 교차로’에서 시낭 송 등. 베니스대학 강연.

이탈리아의 밀라노, 플로렌스, 로마에서 이탈리아어 시선집의 북 투어. 매 도시에서 많은 이탈리아 시인들이 헌정시를 낭송. 이 시선집은 이탈리아의 ‘카마이오레 문학상’ 국제부문에서 3권의 최종 후보 중 하나로 오름.

산문집 『나는 격류였다』 와 『나의 삶 나의 시: 백년이 담긴 오십년』 출간.

『타임스』 아시아판에 특집 기사가 실리면서 ‘현존하는 아시아의 가장 위대 한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음. 『아이리쉬 타임스』에도 특별 기사로 소개됨. 호주의 방송국 ABC가 영어판 『내일의 노래』를 중심으로 특집 방송.

단국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 수여.

서울에서 개최된 제 23회 IFURO(세계산림학 대회)에서 기조연설.

터키 이스탄불에서 개최된 제 2회 WALTIC(작가 번역가 회의) 에서 기조연설.

베트남 하노이에서 시집 출판기념 시낭송회.

1910년 한일합병 100주년을 맞아 합병조약 무효 선언 운동에 참석.

 

2011

미국 당대 예술 프로젝트에서 국제적 작가에게 주는 평생 공로상 ‘아메리카 어워드’ 2011년도 수상자.

전북대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 수여.

시 ‘햇볕’이 호주의 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림.

프랑스어판 『속삭임』과 『순간의 꽃』 출간

독일어판 『순간의 꽃』 출간. 이 시집은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독서 진흥 연구소’의 1분기 ‘최고의 리스트’ 에 “고은은 우리 시대 위대한 서정 시인들의 샤먼이다” 라는 평과 함께 선정, 한국번역도서로는 최초의 도서.

제 23회 체코 프라하 국제도서전에 국제 손님으로 초대되어 시낭송와 인터 뷰 등.

제주도 특별자치도의 명예도민증을 수여 받음.”

고은 시인은 말한다.

“시 혹은 문학에 대한 내 생각은 문학을 이데올로기로 고착시키지 않는데 있다. 문학이 정치와 단절될 수 없는 현실유기체임이 분명하고 작가는 지속적으로 사회적 관심으로부터 일탈할 수 없다. 하지만, 문학의 존엄성만이 문학의 예술적 존립을 지켜 준다는 것과 시가 시의 자궁인 현실이 있어야 태어난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나는 나만의 동굴과 내가 내달릴 산야가 필요한 시의 맹수인 것이다.

 

특히, 문학의 여러 경계를 허무는 일에도 나는 은연중 익숙하다. 장르 확대와 장르 혼합이라는 문제도 그렇고 리얼리즘과 비리얼리즘의 상호삼투도 그렇다.

 

이제 내 문학은 변증법적이건 비변증법이건 하나의 용암류와 같은 종합세계와 직관으로서의 세계 또는 인간의 다양한 서사활동으로서의 세계 그리고 한 소년적 서정체계에 걸쳐 있기를 꿈꾼다.

이와 함께 내 후기의 문학이 어떤 귀결이나 체념의 이웃인 해답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을 발생시키는 힘의 자재(自在)를 지속하게 되기를 바란다. 문학은 누구에게도 나에게도 죽어 버릴 수 없다.”

고은 시인과 개천절 첫 만남 이후, 스웨덴 노벨상위원회는 6일(한국시각 )2011년 올해 노벨문학상은 스웨덴 출신의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Tomas Transtromer, 80)가 선정되었다.

 

고은 시인은 2005년부터 매년 노벨 문학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이번에도 유럽의 스웨덴에 돌아가 아시아의 한국 문학은 다시 내년을 기다리게 되는 아쉬움으로 남게되었다.

 

방방곡곡 김지영 기자 http://bbg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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