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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09/23  김지영
한국 지방자치단체의 모범 청사진, 인천광역시 계양구를 찾아서

2015년 계양정명(定名) 800년이 되는해

1215년 고려시대 계양도호부로 명명

 

 

 

 

계양구, 웰빙 • 문화 • 경제의 고향으로

 

계양산 산림욕장

 

인천광역시 계양구에 살아온 지 25여 년, 아이들이 크고 필자도 56세란 나이가 드니, 이제야 계양구민 이웃의 목소리, 계양산 계곡 물소리 ․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계양구민은 조상 대대로 아니면 이주하여 계양산을 바라보며 이 땅에 길을 내고, 집을 짓고 자식을 탄생시켰고 문화를 영위하며 숨 가쁘게 살아왔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며 성장하는 자식들에게 자신감과 자부심을 선배들에게는 뿌듯한 긍지를 심어줘야 할 것이다.

 

여기계양구 웰빙․문화․경제의 고향 만들기’로 계양인의 정(情)을 함께 담으며 우리의 미래를 그려본다.

 

 

계양구는 인구 및 면적은 343,118 명(2013.8.30 기준, 남172,233 여170,885) 45.58 ㎦(인천시의 4.7%)이고, 행정구역은 11동 460통 2,400반이다.

 

 

 

초대 배세일 구청장
계양구 역대 구청장,
초대 백세열(白世烈) 청장은 1940.3.4 생으로 재임기간이 1995.3.1~1995.6.30 이다. 구정방침은 ‘뻗어가는 새도시 희망찬 계양구’, 취임하며 ‘세계화로 전진하는 해’를 선언하였다.

 

민선 제1대 이현진 구청장
민선 제1대 이헌진(李憲珍) 청장은
 1937.5.18 생으로

재임기간이1995.7.1~1998.6.30 이다.

구정방침 ‘발전하는 계양’, ‘긍지와 보람은 주민에게’ 라 정하여 주민동참으로 지방 자치 기반구축, 주민을 찾아가는 생활 행정 실현, 주민의 뜻을 모아 발전하는 계양건설을 실천하였다.

 

 

민선 제2대 이익진 구청장
민선 제2대 이익진(李翼振) 청장은
 1940.7.20생으로

재임기간이 1998.7.1~2002.6.30 이다.

구정 방침은 구민과 함께하는 풍요로운 계양건설, 양질의 행정서비스로 철저한 봉사행정구현, 행정규제완화와 권위주의 철폐, 재정자립 달성을 위한 경영마인드 도입, 주민여론에 기초한 신뢰행정구축, 구민위주의 봉사행정구현,더불어 함께 사는 복지사회 구현, 편리하고 쾌적한 도시환경 조성, 향토문화 창담 및 생활체육 진흥을 실천하였다.

 

 

민선 제3대 박희룡 구청장
민선 제3대 박희룡(朴喜龍)
청장은1941.7.12생으로

재임기간이 2002.7.1~'06.6.30 이다.

구정 방침은 구민의 마음은 하나로 계양의 힘은 미래로, 반듯하고 투명한 자치행정구현, 선도적인 양질의 행정서비스구현, 향토문화 진흥 및 정체성 확립, 살기좋은 넉넉한 복지사회건설을 실천하였다.

 

 

민선 제4대 이익진 구청장
민선 제4대 이익진(李翼振) 청장은
1940.7.20생으로

재임기간이 2006.7.1~'10.6.30 이다.

구정방침으로는 발전하는 계양, 밝은 미래도시, 지역경제 활성화로 자립기반 조성, 교육기반 조성으로 지역인재 육성, 함께나눈 고통으로 넉넉한 복지건설, 쾌적한 환경으로 문화생활 영유을 실천하였다.

 

 

민선 제5대 박형우 구청장
현재 민선 제5대 박형우 구청장
은 글로벌 교육 중심 인재육성, 자연이 어우러진 GREEN도시, 구민과 소통하는 열린행정, 희망을 나누는 복지구현, 활력이 넘치는 지역경제 등의 구정 목표로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앞으로 민선 제6대 구청장은 어떠한 구정방침으로 미래를 이끌어나갈지 구민들의 관심이 모이고있다.

 

 

옛날 우리 계양(桂陽)

 

선사시대

청동기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석부가 계산동에서 발견, 부평(富平)의 지명은 고구려시대주부토군(主部吐郡)이라고 한 것이 첫번째 고을 명칭이다. 신라에는 장제(長堤), 고려 초에 수주(樹州),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 백제 때에 부평을 주부토(主夫吐)라 적고 있다.

 

백제가 한강유역을 지배 할 때(초기부터 근초고왕 이후)는 백제에 귀속,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유하고 있을 때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이후)에는 고구려에 예속,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유할 때(진흥왕대 이후)에는 신라의 영토였다.

 

 

삼한시대

삼한 전체가 진국의 땅이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에 부평은 진한의 영역에 속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시대

계양지역은 고구려 시대에 주부토라 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 장제군(長堤郡)으로 고쳐졌으며, 백제에 복수하라는 선왕인 광개토대왕(廣開土王)의 뜻을 받은 고구려의 장수왕(長壽王)은 선왕의 영토확장 정책을 계승하여 광대한 지역을 개척하였다. 장수왕은 96세의 장수를 누린 군주였는데 동왕 15년(427)에 왕도를 집안(集安)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기고 동왕 58년(470)에 옛 대방군의 영역인 김포반도에 주부토군을 설치하였다.

 

중세시대

송악(지금의 개성)지방의 왕건(王建)은 818년 궁예를 추방하고 왕위, 935년에 신라를 귀속, 태조19년(936) 후백제의 항복으로 후삼국을 통일, 이때부터 계양 부평지역은 고려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태조(太祖) 23년 (940)에 수주(樹州)로 개명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의종(醫宗) 4년(1150)에 안남도호부로 개칭되었다.

안남도호부 65년만인 고종 2년 (1215)에 계양도호부로 개칭되었다.

충렬왕(忠烈王) 34년(1308) 계양도호부를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충선왕(忠宣王) 2년(1310) 부평(富平)이란 지명이 생긴 시초이다.

 

개축전 부평도호부(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호)

 

근세시대

부평부(富平府)

 

근대시대

부평군

 

일제강점기시대

부평부는 경기도 직할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부평군의 폐지와 부천군이 신설 되었다.

 

정부수립과 계양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1호에 의하여 김포군 계양면이 인천시에 편입하여 북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평군의 부내면은 일부가 부평구(富平區)로 독립을 하고 부내면의 일부와 계양면이 통합하여 계양구(桂陽區)가 되었다.

 

1914년 4월 1일 부평군을 폐지하고 부천군
신설하면서 면(面)을 통합할 때에 동면(東面), 당산면(堂山面), 황어면(黃魚面)을 통합하여 계양면이라고 하였다. 계양면은 1973년 김포군으로 편입하였다가 1989년에 인천직할시에 편입되면서 북구 계양동으로 되고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계양구가 된 것이다.

 

 

계양구의 동(洞) 유래

 

효성동(曉星洞)

효성동 지역은 원래 급수원이 없어 황무지 벌판에 억새풀이 많이 자생한「새벌」,「새벌이」로 불려왔으나 발음이 와전되어「새별」,「샛별」로 변해 한자표기 하면서 효성동 지역은 부평군 마장면 효성리였으나, 1914년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고 1940년 인천부로 다시 편입되어 서정으로 개칭되었다가 1946년 효성동으로 다시 개칭되었다.

 

계산동(桂山洞)

계산동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주부토군, 통일신라시대에는 장제군. 고려시대에는 수주, 안남, 계양, 길주, 부평군으로 불려진 유서깊은 고장이다. 이곳은 원래 부평읍이었으나, 1914년 부천군 부내면으로 개칭되었고, 1940년 인천부로 다시 편입된 후 대정정(大正町)으로 개칭되었다가 1946년 계양산 밑에 위치하였다 하여 계산동으로 개칭되었다. 이곳에는 계양산에 있는 중심 성지(衆心城地)를 비롯하여 계양산성, 부평도호부청사, 어사대, 욕은지 등 많은 문화유적지가 있다.

 

작전동(鵲田洞)

작전동(鵲田洞) 지역(地域)은 구한말 화전리, 신대리, 가현리, 작정리의 4개리로 1914년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編入)되었고, 1940년 인천으로 다시 편입되어 화전, 신대, 가현, 작정 4개리를 통합하여 가장 큰 마을인 작정과 화전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작전정(鵲田町)으로 개칭되었다가 1946년 작전동(鵲田洞)으로 개칭(改稱)되었다. 작전동 지역에는「된밭」,「새대」,「까치말」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서운동(瑞蕓洞)

서운동(瑞雲洞): 서운동(瑞雲洞) 지역(地域)은 원래 부평군 서면에 속하였으나, 1914년 부천군 부내면에 편입되었고 1940년 다시 인천부에 편입되며 도두리와 하마리를 통합하여 동운정(東雲町)이 되었고 1946년 상서로운 고장이 되어 주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서운동(瑞雲洞)으로 개칭(改稱)되었다.

 

계양동(桂陽洞)

계양이란 명칭은 고려시대 계양도호부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계양산은 수주악, 안남산으로 불려왔으며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많이 자생하여 두나무 이름에서 한글자씩 따서 계양산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계양동 지역은 1914년 임학리, 용종리, 병방리, 박촌리, 동양리, 귤현리, 상야리, 하야리, 평리 등을 통합하여 부천군 계양면에 편입되었고 1973년 경기도 김포군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인천시로 편입된 지역으로 현재 계양구 면적의 약 67%를 차지하는 광활한 면적에 19개의 법정동으로 구성된 거대동으로 향후 계양구 발전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되는 지역이다.

 

임학동(林鶴洞)

낙락장송 큰 나무가 많아 경치가 아름답고 백로가 많이 서식하였다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용종동(龍宗洞)

계양산 줄기가 임학골 서쪽을 감싸고 길게 흘러내려 그 형국이 용의 등과 같다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병방동(兵房洞)

조선시대(1455년) 이곳에 중익진(中翼陣)을 설치하여 병영이 주둔하면서 유래된 지명이다.

 

방축동(防築洞)

마을앞에 방죽을 막아 방죽말이라 불리며 유래된 지명이다.

 

장기동(場基洞)

우시장(매월 3, 8, 13, 18, 23, 28)이 열려 황어장터, 황어장이라 불리며 장이 서는 곳이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갈현동(葛峴洞)

칡이 많이 생산되는 마을이라 하여 칡미, 갈산(葛山)으로 불려왔으나 1989년 인천으로 편입될 때 부평구 갈산동과 중복되어 갈현동으로 개칭하였다.

 

오류동(梧柳洞)

오리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유래된 지명으로 오리울, 오릿골, 오류올, 오류동으로 불리어 왔다.

 

둑실동

조선시대(1596년) 부평도호부사 심신겸이 퇴임 후 원래 청백한 분이라 가진 재산도 없이 이곳 황무지에 낙향하여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개간을 하는데 합동단결 하자는 깃발을 만들어 꽂고 농경에 힘써 마을이름도 그 뜻을 담아 둑실이라 하였다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목상동(木霜洞)

계양산 깊숙한 곳에 위치하여 수풀이 울창하고 일조량이 적어 나무에 서리가 걷힐 사이가 없어 나무와 서리의 마을이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다남동(多男洞)

여자보다 남자가 많아 다랑(多郞)이라 불리며 유래된 지명이다.

 

선주지동(仙住地洞)

큰 홍수가 나서 이재민을 구하기 위하여 배가 머물렀다하여 선주(船駐)라 불리며 유래된 지명이다.

 

이화동(梨花洞)

한강으로 통하는 배가 드나드는 곳이라 배곶이, 배꼬지, 선곶(船串)이라 불리다 한자표기를 잘못하여 배(梨), 꽃(花)으로 불리며 유래된 지명이다.

 

상야동(上野洞)

벌판에 마을이 위, 아래로 있어 위쪽 마을을 윗벌말 또는 상야촌으로 불리다 유래된 지명이다.

 

하야동(下野洞)

벌판에 마을이 위, 아래로 있어 아래 마을을 아랫벌말 또는 하야촌으로 불리다 유래된 지명이다.

 

평동

벌판이 많은 마을이라 하여 벌말로 불려왔으며 일제시대 평뜨기(수확량측정)를 많이 하였다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귤현동(橘峴洞)

굴재고개 아래 위치하여 굴재, 굴현으로 불리다 유래된 지명이다.

 

동양동(東陽洞)

계양지역의 동쪽에 위치하였고 1914년 당미, 양지말, 모텡이, 동녘해, 서녘해를 통합하여 동녘해와 양지말의 이름을 따서 유래된 지명이다.

 

박촌동(朴村洞)

박씨(朴氏) 집성촌으로 조선조 중기까지 300호 이상의 박씨가 모여산 부평 제1의 집성촌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노오지동(老吾地洞)

큰 연못에 오래 묵은 잉어가 있어 노어지(老魚池)라 불려지다 유래된 지명이다.

 

 

계양구의 역사적 인물

 

공 유(孔 愉)

공 유는 고려 원종 때 무신으로 원종 11년(1270) 삼별초난으로 당시 나주가 7일간이나 공격을 받았는데 장군으로서 이를 막지 못했다는 추밀부사를 지낸 김방경의 탄핵으로 인하여 면직된 바 있었으나 원종 13년(1272) 계양도호부사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임 중 다시 삼별초의 습격을 받게 되어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처자와 함께 그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이 일은 과거 공 유에 의해 삼별초가 피해를 당한 보복공격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부평고을 연해에 배를 대고 곡식, 가축(소, 돼지)등 닥치는 대로 약탈이 극심하니 공유부사가 이를 결사적으로 저지하였으나 패하여 결국 포로가 되었다. 공 유는 삼별초에 끌려가서 1년간이나 모진 고초를 겪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하게 되었고 원종은 공 유의 공훈을 치하했고 충렬왕 때 대장군이 되고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충렬왕 13년(1287)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이규보(李奎報)

고려 고종 때 문신으로 자는 춘경(春卿)이고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또는 지헌(止軒) 그리고 술, 거문고, 시를 즐겨 삼혹호 선생(三酷好 先生)이라 했다. 명종 20년(1190)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목사록 겸 장서기(全州牧司祿兼掌書記) 병마록사 겸 수제(兵馬錄事兼修製)를 거쳐 희종 3년(1207)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었다.

 

고종 6년(1219) 좌사간(左司諫) 벼슬에 있을 때 지방관의 죄를 묵인해 줬다는 혐의로 그의 나이 52세에 계양도호부사(桂陽都護副使)로 좌천되었다가 그 이듬해 중앙관직인 경직(京職)으로 승진되었다.

계양부사 재임 13개월에 수많은 시문(詩文)을 남기어 훗날 『동국여지승람』과 『부평읍지』의 기틀이 되고 또 부평고사연구에 큰 자료가 되고 있다.

 

고종17년(1230)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우첨사 지제고(判·書省事 寶文閣學士 慶成府右詹事 知制誥)에 올랐고 그 이듬해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知文下省事 戶部尙書 集賢殿大學士 判禮部事)가 되고 고종 24년(1237) 금자광록대부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태보(金紫光祿大夫 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禮部事 翰林院事 太子太保)로 퇴관했다.

 

호탕 활달한 시풍으로 당대를 풍미한 걸출의 시호(詩豪)였다. 벼슬이 바뀌어 부임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로 유명했다. 처음에는 도연명(陶淵明)의 영향을 받았으나 자기 개성을 살려 독자적인 시격(詩格)을 이룩했고 몽고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서 격퇴한 명문장가로 시호는 문순공(文順公)이다.

 

이희목(李希穆)

이희목은 신라말 부평지방의 호족(豪族)으로 부평 이씨의 시조이다.

 

허홍재(許洪材)

고려 인종 12년(1134)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의종 18년(1164) 안남도호부사가 되었다. 그 다음해 안남도호부청사를 오리울(船串)에서 지금의 계산동 중구봉 밑으로 이전하였는데 이곳을 온수골(溫水洞)이라 불리었다.

 

그는 이곳에 초정(草亭)의 축대를 모으고 척서정(滌署亭)이라 이름하고 의종 24년(1170) 문하시중랑동평장사(門下侍中郞同平章事)가 되었다.

 

김인수(金仁樹)

김인수는 수주 김씨의 시조이다. 그는 부평고을의 호족으로 부평 이씨와 쌍벽을 이룬 문벌로 후손이 소감(少監)을 지낸 김정실(金鼎實)이 있고 그의 후손은 번성하여 평안 남북도 지방에 수백 호가 살고 있다고 한다.

 

계양산 제1약수

 

계양삼호걸(桂陽三豪傑) 및 계양팔문장(桂陽八文章)

고려조 때에는 이곳 계양삼호걸로 윤징고(尹徵古), 손변, 이위(李瑋)를 일컬었거니와 이조 중기 이후 계양산을 중심으로 대명사처럼 불리던 계양삼호걸은 박규문(朴奎文), 이장(李莊), 남휘(南揮)를 말하며 계양팔문장은 변혁조(卞赫朝), 박선(朴宣), 이상(李尙), 남징(南澄), 남연(南 淵), 이동표(李東標), 한세보(韓世輔), 양익현(梁益賢)을 일컬어 당대를 주름잡았던 인물들로 그 후손들이 지금도 문집을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당시 계양삼호걸 및 계양팔문장의 인물행적은 다음과 같다.

 

계양삼호걸

 

박규문(1670~1741)은 부평고을 오정(三井洞)에 정착한 박 선(朴 宣)의 아들로 세자시강원의 정4품 필선을 지냈으며 효성이 지극하기로 유명하였고 유서에서 ‘서산(瑞山) 부모 묘(墓)아래에 조그마한 자리가 있으면 그곳에 나를 묻어라. 그리하여 후손들이 나에게 성묘오면 나의 부모 묘도 함께 살피게 되어 오래도록 성묘가 끊이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하여 이를 실천케 하였으며 자신의 행적을 적은 행장(궁와집) 1권을 남겼다.

 

이 장은 부평고을 오정(內洞)에서 활동하던 전주 이씨 효령대군 9대 손으로 생원을 지냈다.

남 휘는 부평고을 오정(始月洞)에 정착한 계양팔문장가 중 한 사람인 남 연(南 淵)의 아들로 금부도사를 지냈다.

 

변혁조(1730~1806)는 부평고을 오정(古康洞) 출신으로 정조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시의를 논한『시론』이 전해지고 있다.

 

박 선은 부평고을 오정(三井洞)에 정착하였으며 168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를 지냈다.

 

개화 이후 인물

 

강한성(姜漢成)

강한성은 부천군 계양면 귤현리(귤현동) 출신이다. 그는 사업가로서 경향정미소(정부양곡도정업체) 경향산업사, 한일연탄공장, 경향주유소, 경향여객운수회사 등을 경영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또 북구청자문위원, 인천시자문위원, 상공회의소의원, 통일주체국민회의 북구대표의원 등을 역임하고 부평지역 발전에 기여하였다.

 

권병훈(權丙勳)

권병훈은 안동 권씨로 부평고을 당산면 동양리(東陽里)출신이다. 대사성(大司成) 권 환(權 環)의 6세손으로 개화 초기 신식교육을 이수하고 한말 고종 17년(1880)에 황해도 재령재판소(載寧裁判所) 검사(檢事)를 역임하였다.

 

충신 김득남(金得男)

김득남은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곳에서 무관을 지냈다. 한강을 지키는 첨사(僉使)로 재임하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 14년(1636) 임진 12월 청태종(淸太宗)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심양(瀋陽:지금의 봉천)을 떠난 지 불과 10여일 만에 한양(漢陽)에 육박하여 쳐들어왔다.

 

44년 전 임진왜란의 뼈저린 고생을 상기하고 한양성 안에서는 모두 피난을 떠나느라 온 장안이 술렁대며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나라에서는 원임대신 윤 방(尹 昉)으로 하여금 종묘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비, 원손, 세자인 봉림대군(鳳林大君) 등을 데리고 강화도로 피신토록 하고 인조도 뒤따라 강화도로 피난을 떠났지만 이미 청군이 길을 막으니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길을 돌렸다. 그 때가 청군들이 강화도를 함락하고 한양성을 침공할 무렵이었다.

 

서해 병참기지인 철곡첨사(鐵谷僉使) 김득남은 용감하고 충직한 장군으로 그는 부하를 이끌고 부평땅 굴포교 강화 길목을 차단하고 청군의 한양 진격을 저지하였다. 김장군은 예하 부대와 도중에 가담한 의병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결사적으로 분전하니 청군들은 할 수 없이 길을 돌려 그 남쪽에다 돌다리를 새로 놓고 통과하였다.

 

이 다리가 동양동과 상야동 사이의 굴포천 다리로 『부평읍지』에는 굴포석교(掘浦石橋)로 나오는데 오랑캐가 놓고 건너갔다고 하여·오랑캐 다리·또는·호교(胡橋)·라 불려왔다. 김장군은 다시 청군을 쫓아가 말을 타고 적병을 저지하며 용감히 싸웠으나 수백 배가 넘은 적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드디어 적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부하들도 거의 다 죽고 말았다. 난이 평정된 후 나라에서 그의 훈공을 가상히 여기어 벼슬을 높여 주고 충신의 정려를 내렸다.

 

그는 강화 표충사(表忠詞)에 병자호란 때 유공한 사람들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연려실기술(然藜室記述)』에는 이를 이렇게 적고 있다.『철갑첨사 김득남은 22일 자원 출전한 의병 30여명을 스스로 이끌고 부평 땅에서 전쟁을 하였는데 말을 타고 좌충우돌 정신없이 용전분투하였다. 적의 화살이 안면에 맞아 결국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 후 표충사에 배향하였다』라고 했다.

 

김성호(金聖鎬)

김성호는 부천군 계양면 출신이다. 1964년에 장기리(場基洞)에 사설 우체국을 신설하고 우체국장이 되어 우체업무에 기여했다.

 

김원순(金元順) 이공우(李公雨) 최성옥(崔成玉)

김원순, 이공우, 최성옥 등은 기미년 3월 24일 계양면 장기리에서 벌어진 만세사건에 가담하여 시위를 벌인 뒤 계양면 서기(桂陽面書記) 이경응이 당국에 밀고한 것으로 오인하고 시위 군중 수십명과 작당하여 이경응의 집을 헐어버렸다. 이에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각기 10월씩 징역을 살고 나왔다.

 

박병오(朴炳吾)

박병오는 부평고을 부평읍(桂山洞) 출신으로 한말에 감찰을 지냈다. 만년에 도두리 황무지 개척사업(서운동 지역)으로 부자가 되었으며 그의 외아들 박용직(朴容直)은 농사에는 뜻이 없고 연예계에 몸담아 방랑하므로 도두머리 방죽안 땅을 결국 인천의 갑부 장래희에게 넘기고 말았다.

 

심상은(沈相殷)

심상은은 청송 심씨로 부평부 계양면 둑실리 출신이다. 평생 한학 연구에 전념하며 학식과 덕망이 높았다. 후에 부평향교 전교를 지냈다.

 

지사 심혁성(沈爀誠)

1919년 기미 만세운동이 일어난 2년 후의 일이다. 때는 신록이 우거지는 5월 초순 지금의 장기동(場基洞)인 황어장터에서 장날 30대의 청년 한 사람이 장돌뱅이 행상들의 물품을 모두 사서 한곳에 쌓아 놓고 돈 안 받고 거저 드리니 한가지씩만 마음대로 가져가시오 하고 소리쳐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시작하여 닷새에 한 번씩 열리는 황어장날이면 꼭 나와서 선심을 썼다. 이 청년이 다름 아닌 2년전 기미 3·1운동 때 관서지방에서 가장 큰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나온 주모자 심혁성이다.

 

그는 나라가 없어졌는데 재산이 무슨 소용이냐고 계양면 오류리(梧柳洞)에 있는 자기 가대와 전답을 헐값으로 팔아 3·1만세를 불렀던 그 장터에 나와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생필품을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 재산을 없애고 나는 대한의 백성이지 왜놈이 될 수 없고 한푼의 세금도 낼 수 없다·하면서 처자식을 거느리고 두메산골로 은신하고 말았다.

 

지리산과 덕유산으로 또 강원도 심산유곡으로 산사람으로 30년간 약초를 캐어다 팔아 연명을 해가며 오직 조국의 광복만을 염원하였던 것이다. 또한 만주 등지를 왕래하면서 우국지사들과 만나 독립운동을 거들었던 것이다.

 

그는 유명한 청백리 청천당 심수경(沈守慶)의 후손으로 원래 성격이 쾌활하고 의리가 있으며 천도교(天道敎)를 신봉하여 교주 손병희(孫秉熙) 선생의 교훈이 그의 애국심을 북돋아 준 것이라 믿어진다.

8·15 해방 후 산사람 생활을 청산하고 적수공권으로 고향인 풍산 심씨 마을인 백석동으로 돌아와 여생을 조국에 이바지하다가 죽었다. 선조인 심정승 수경(守慶)은 임란공신으로 의병을 모아 팔도의병대장(八道義兵都大將)이 되어 왜군과 싸웠고 말단 관리로부터 시작한 벼슬이 우의정(右議政)까지 지내면서도 결백한 행실로 나라에 공헌한 분이다. 이 심혁성 역시 조상의 기질을 타고나 명리를 헌신짝 같이 버린 근세에 드문 부평지방의 우국지사였다.

 

안병혁(安炳赫)

안병혁은 고종 말 부평고을 작전동 출신이다. 개화기 교육을 받고 구한말 내무부 주사(主事)를 지냈다. 고향에 내려와 부평군 서면장(西面長)을 역임하고 계양면장으로 있을 때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때 군중들의 청탁으로 태극기를 그려주는 등 많은 일을 도왔다. 또한 순절한 이은선(李殷先)의 순절회문(殉節回文)을 송희선(宋熙善) 임대규(林大奎)와 함께 작성하였다.

 

윤경의(尹敬儀)

윤경의는 파평 윤씨로 부평 계양면 오류리 출신이다. 한학자이며 덕망이 높아 성균관 박사(成均館 博士)를 지내고 부평향교 전교(典校)를 역임했다.

 

지사 이 담(李 潭)

이 담은 부천 계양면 출신으로 기미년 3월 24일 만세운동 때 심혁성 이은선 이공우 등과 함께 황어장날 대한독립만세 시위를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충신 이 의(李 倚)

이 의는 부평 이씨(富平 李氏) 명문가에서 태어나 고려 말엽에 벼슬을 한사람이다. 그런데 이성계(李成桂)가 새 나라를 세우고(1392) 고려국이 멸망하자 이 의는 고려의 한 신하로서 감히 다른 나라를 받들 수 없다는 충신불사이군의 절개를 지켜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다.

 

이 두문동 72인 가운데 인천 출신으로 인천 채씨인 채귀하(蔡貴河)와 인천 이씨인 이약 두 사람이 있었고 부평사람으로는 부평 이씨 이의 한 사람이었다. 이 태조는 이의를 불러 그 학식과 덕망을 아껴 새 왕조에서 벼슬할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이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태조는 이의의 가산을 몰수하고 자연도(紫燕島:영종도)로 귀양을 보냈다. 이의는 영종도에서 고려에 충절을 지키며 일생을 마치었다.

 

그의 고고한 절개를 본받아 부평 이씨 문중에서는 충신과 효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현재 용현동(龍峴洞)은 옛 이름이 비레이라 불렸으며 이 곳에 부평 이씨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고려 충신 이이의 후손들이라고 전한다.

 

이경응(李敬應)

이경응은 김포 대곶면(大串面) 출신이다. 계양면 면서기로 재임 중 기미년 만세사건 당시 대중의 시위를 밀고하였다고 오해받기도 한 그는 부천교육부 서기 부평학교 교원을 지내고 그 후 서곶 면장 부천군 교육위원 등을 역임했다.

 

지사 이공우(李公雨)

이공우는 계양면 사람으로 기미년 3월 24일 계양면 황어장터에서 심혁성과 함께 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기옥(李基玉)

이기옥은 전주 이씨로 부천군 계양면 다남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교원으로 출발하여 중학교 교장을 지내고 국정교과서인쇄소 사장 및 홍인문화인쇄소 사장(弘人文化印刷所社長)을 지냈다.

 

충신 이대성(李大成)

이대성은 전주 이씨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예이고 영신군(永信君)의 손자이다. 자는 경백(景伯)으로 중종 14년(1529)에 부평고을 가현(佳峴:작전동)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자는 명원(明原)이다. 왕족 명문출신인 그는 일찍이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는 왜적과 대치하였는데 왜군 두목은 이대성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그는 왜군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이 오랑캐 놈들아 왜 남의 나라를 침략하느냐 하고 대항하니 왜군들은 그를 즉석에서 살해했다고 한다.

 

훗날 나라에서는 그의 충정을 전해 듣고 벼슬을 높여 참의로 추증하였고 충절의 정려(旌閭)를 내렸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효성동 및 갈산동에 많이 살고 있으며 그의 묘는 양주군 장흥면(長興面)에 부친의 묘와 함께 있다.

 

충신 이예수(李禮壽)

이예수는 부평고을 사람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남포현감(藍浦縣監)으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진주성(晋州城)이 위급하게 되므로 의병을 일으켜 인솔하여 달려가보니 성은 이미 함락된 뒤라 시체가 산더미 같은데 뛰어들어 많은 왜적을 사살하였다. 그 때 엄지손가락이 부상을 당하자 왼손으로 활을 당겨 적을 무찔렀는데 적이 물밀 듯 밀어닥치는 바람에 중과부적으로 적의 흉탄에 맞아 전사하였고 왜란이 평정된 뒤 선조는 그의 전공(戰功)을 높이 찬양하여 벼슬을 올려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추증하였고 충신의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지사 이은선(李殷先)

이은선은 부천군 계양면 사람으로 기미년(1919) 3월 24일 계양면 황어장터(場基洞)에서 심혁성과 함께 만세시위 중 선두에서 지휘하다 인천경찰서 부내지서(桂山洞) 순사의 칼에 맞아 순절하였다.

 

황의영(黃義永)

황의영은 부천군 계양면 목상리 출신이다. 대학을 나와 철학박사가 되어 국내에서 명성이 높았다. 지금은 미국에 이민하였다.

 

송윤과 부평향교

송윤(宋玧)의 자는 영중(榮仲)이요 진천 송씨이다. 송 윤은 선조 36년(1630)에 한양에서 태어났는데 벼슬을 하다가 부평 간재울에 낙향하여 살았다고 한다. 송 윤은 유교사상이 철저하여 향리에서 유림들을 지도하였으므로 이름이 났다. 송윤은 34세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는데 송윤은 그때 부평문묘(富平文廟)에서 유생들을 가르쳤었다.

 

청군(淸軍)이 강화를 침공하고 남한산성으로 집결하고자 부평을 통과하면서 부평부청사와 부평향교(富平鄕校)에 불을 질렀다. 향교가 불에 활활 타오를 때 송윤은 생명을 무릅쓰고 향교 대성전에 뛰어 들어가 공자 및 열성위의 위패를 거두어 나왔다. 그는 위패들을 계양산 서쪽 경명현(景明峴)을 넘어 바위틈 속에 숨겨 놓았다가 병자호란이 끝난 뒤 시국이 안정되자 타버린 향교재건운동을 벌여 향교를 복원시켰다.

 

유림들은 송 윤의 숭유(崇儒)정신을 높이 받들어 유림의 대표로 하였고 그 후 송윤은 가선대부동지중추 부사 겸 오위도총부부총관(嘉善大夫同知中樞 府使 兼 五衛都總府副總管) 벼슬에 이르렀는데, 그는 장수를 누리고 80세를 일기로 1693년 11월 26일에 별세하였다.

아직도 계양산 아래에 공자의 위패를 모셨던 곳을 공자지벌(孔子之原)이라고 한다. 또한 유림명부(청금록)에 그의 이름이 제1호로 등제되어 있어 향교에 대한 그의 공적을 입증해주고 있다.

 

계양 전설속으로

 

계양산 장사굴

계양산 상봉 남쪽 중턱에 굴 하나가 있다. 굴 입구는 비좁아 사람이 기어들어 가야만 되고 안으로 들어가면 5~6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이 굴 안에서 촛불을 켜놓고 기도한 흔적이 남아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이 굴에 대하여 세가지 전설이 있는데, 첫 번째는 옛날 이 굴에서 장사가 났는데 어찌나 힘이 세고 컸는지 그 장사(壯士)는 그 굴에서 나와 남쪽으로 걸어가 영성산(靈城山) 기슭을 지날 때 넓적한 바위를 밟고 지나갔었다고 하는데 발자국이 그 바위에 패여 남아있다고 전해지며, 두 번째로 옛날 임진왜란 때 왜군이 부평 땅에 침입하여 부평향교에 불을 지를 염려가 있어 유생들이 향교에 있는 공자를 위시해 여려 명현들의 위판을 이 장수굴에 안치하였다가 난이 평정된 뒤에 다시 봉안하였다. 인근 향교는 모두 불에 타니 훗날 이를 표본으로 삼고 다시 제작하여 갔다고 하며 그 위판을 장사굴에 보존한 교생(校生) 박무영(朴茂榮), 박대충(朴大忠), 이언복(李彦馥) 등 세 사람에게는 숭유정신(崇儒精神)의 귀감이 된다하여 참봉 벼슬을 내리고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고 한다. 세 번째로는 계산동에 사는 도술 철학자인 박거사(朴居士)가 굴에서 도통(道通)하기 위해 장기간 수도한 곳이라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은 일제시대에 입구가 폭파되어 붕괴되었으며 자갈 무더기가 널려있다.

 

아남산 부싯돌

조선 말인 고종 17년(1880) 서양에서 성냥이 들어오기 이전에는 불을 피울 때 부싯돌(点火石)을 사용하였다. 이 부싯돌은 가정에서는 물론 개개인의 필수품으로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불을 붙일 때는 넓적한 쇠판에다 깃(불이 잘 당기는 풀)을 대고 부싯돌을 부딪치면 불이 깃에 당겨 불이 일어나도록 했다.

 

부싯돌로 아남산(阿南山:桂陽山)에서 생산된 돌이 불이 잘 일어나 이를 많이 사용했다. 그래서 계양산 주변 사람들은 농사를 다 짓고 나면 부업으로 이 돌을 캐어 짊어지고 한양(서울) 장안을 돌면서 ‘부싯돌 사려’ ‘아남산 부싯돌 사려’하고 외치며 돌을 팔았다. 후에 알고 보니 부평 인천 바닷가의 돌이 더 품질이 좋아 이것으로 대용하였다고 전한다.

 

계양산과 12사찰

계양산은 한서(한강서쪽) 지방의 주산(主山)이다. 여러 산을 거느리고 있어 산군대(山郡帶)를 이루었다. 전해지기를 계양산(桂揚山)에는 12개의 절이 있었다고 전하여지는데 그 절터를 살펴보면 남쪽인 부평읍쪽에 2개소, 동쪽 계양지구에 1개소, 북쪽 계양방면에 6개소, 서쪽인 서곶 방면에 3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여기 저기 절터로 보이는 곳이 발견되고 있기도 하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및 『부평읍지』등에는 계양산 서쪽에 만일사(萬日寺) 북쪽에 명월사(明月寺)가 있었음이 표시되어 있다. 이 절 이외에 조선 중기 때 절이 너무 많아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된 이외의 절은 모두 왕명으로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을 쓸 때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은 근대에 지어진 지선사, 성불사, 덕흥사 백룡사등이 계양산을 중심으로 남쪽과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과거길에 뱀을 활로 쏜 류 장사의 비극

부평읍 심일(深逸)마을 류(柳)씨 문중에서 기골이 장대한 청년 장사(壯士)가 있었다. 모두가 그를 보고 류 장사라 불렀다. 그는 청운의 꿈을 품고 무예를 열심히 연마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무과시험을 보기 위해 큰 활을 메고 한양 땅으로 떠났다.

 

그가 한다리를 건너가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큰 뱀 한 마리가 나타나서 앞을 막아서는 것이였다. 그는 재빨리 활시위를 당겨 구렁이를 쏘았는데 그 뱀은 몸에 화살이 꽂힌채 유유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의외로 과거 길에 괴이한 일을 당한 것이었다. 잠시 후 생각하기를 과거 길에 뱀을 쏘다니 하고 불길함을 느꼈다.

 

서울 장안에 당도하여 무과시험에 응시하였으나 웬일인지 자기 재주를 발휘하지 못해 여지없이 낙방하였다. 실의에 빠져 집에 돌아온 류 장사는 자나깨나 과거 길에 뱀을 쏜 일은 경망한 행동이라 자책해왔는데, 십여 일 후에 일이었다.

 

그는 뱀을 쏜 다리에 가 보았다. 그런데 화살이 꽂힌 구렁이가 나타나 자기를 따라 도는 것이다. 그 구렁이의 등에 박힌 화살을 빼주려고 하니 구렁이 아닌가? 어느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허탈에 빠진 그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이게 웬일인가 류 장사의 눈앞에 기이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방이나 마당이나 장독대, 부엌 등에 온통 화살이 박힌 구렁이 투성이었다. 그는 정신을 잃고 실성한 사람이 된 것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도두리 황무지를 개척한 박감찰

부평읍(계산동)에는 한말에 벼슬한 박 감찰(朴監察)이 살았다. 그의 본명은 박종오(朴鍾吾)이고 밀양 박씨이다.

 

박감찰은 욕심이 많아 항상 생각하기를 무엇을 해서 부자가 될까하고 궁리한 나머지 부평평야의 습지인 황무지를 개척하기로 하고 지금의 서운동 넓은 들에 거점을 잡고 우선 개간하기 쉬운 곳에 말뚝을 박고 표시를 한 다음 인근 사람과 김포 등지에서 사람을 모집해서 개간을 시작하였다.

 

그 시기가 한일합방 직전인 1910년으로 작인(作人)들을 이주시켜 우선 둑을 막아 논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제일 먼저 이주한 사람이 과거 친분이 있던 김포 검단면 여래리의 임덕상(林德相)이였다.

박감찰(박 주사)은 임덕상의 협조를 받아 방죽을 막고 개간을 해서 논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허술하게 막은 제방은 7월 장마에 한강이 범람하여 자주 터져 3년에 한번 추수하기가 어려우니 작인들은 살수가 없어 농토를 버리고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박 주사는 좌절하지 않고 끈질기게 힘을 기울여 방수제방을 더욱 튼튼하게 수축하여 방죽안 농토가 50여 정보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임덕상의 연줄로 검단의 박성회, 조백증, 조인수, 이화춘, 임병상, 임병태 등이 이사를 와서 1912년에는 모두 8가구가 살았다.

 

박종오가 이와 같은 개간사업을 시작한 것은 외아들 박용직(朴容直)을 정착시키고져 함이었으나 용직은 농사에는 뜻이 없고 연예계에 몸을 담아 방랑생활을 하니 박 주사는 이 땅을 인천의 갑부 장래형에게 넘기고 손을 떼었다.

 

이 때 땅 관리자로 장석윤(張錫胤)이 상주하였다. 방죽도 매년 수축을 하고 농토도 개간하여 재미를 보았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만나 싹 쓸어버리니 농토도 가대도 모두 폐허가 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일본인 하시다에게 헐값에 팔아 교전농장이 되어 방죽을 더욱 튼튼히 막고 신식 농기구를 들여다 방죽안 모두를 개간하여 180정보를 이룩하고 부평수리조합이 양 배수를 잘하여 옥토를 만들어 한 10년간 지속하다가 1934년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서울의 갑부 김한규(金漢奎)가 교전농장 전부를 인수하여 김보합명회사 농장(가족농장)을 만들고 인근의 차치농장(삼산동) 등을 인수하여 250정보의 대농장을 경영하다가 해방 후 토지개혁으로 땅이 모두 농민들에게 분배되고 말았다.

 

1910년부터 무지공처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니 마을 이름을 만들 때 부평읍(계산동)의 안산격인 망동산 줄기가 동쪽으로 흘러내려 이 마을에 와서 동산을 이루니 동두(東頭)머리라 했던 것이 도두머리로 변했는데 여기다 한자를 붙일 때 도두리(道頭里)가 되었다.

 

큰 장사가 난 까칫말

까칫말(까치마을)은 지금의 작전동 작정마을(鵲井村)을 말한다. 작정(鵲井)이란 까치우물을 뜻하는데 작정마을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 주위에는 나무가 무성해서 까치가 많이 모여들어 동네 이름을 작정리라 불렀다.

 

옛날부터 전해 오기를 이 물을 먹으면 장사가 난다는 것이다. 근세에 이르러 광산 김씨(光山 金氏) 중에서 한 장사가 나왔는데 그는 청년시절 타작 마당에 갈 때면 매통(탈곡할 때 사용하던 나무 통) 대신에 수백 근 되는 암석을 굴리고 다니며 타작을 하였다고 한다.

 

훗날 그 장사는 감찰벼슬을 해 김 감찰이라 불리었다. 그 후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에 떠돌이 중이 이 우물에 빠져죽어 이 우물은 폐지되고 말았으며 또한 장사도 안 나온다고 전한다.

 

황어향과 노어지 마을

황어향(黃魚鄕)의 황어란 누런 잉어를 뜻하는 것으로 옛날에는 이 고장이 한강변에 위치해 있어 여름 홍수 때가 되면 한강물이 흘러 넘쳐 잉어 산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그래서 고려 초에는 황어현(黃魚縣)이 있었던 곳으로 향(鄕)이란 큰 고을을 지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계양지방에는 노오지리(老吾地里)란 마을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마을이 선주지(仙住池)로 편입되어 이름까지 소멸된 것이다. 그런데 노어지(老魚地)의 잘못된 표기로서 이 마을에는 큰 웅덩이인 못(池)이 있었다고 한다. 이 연못에 늙은 잉어(老魚)가 많이 있어 노어지(老魚地)라 불렸던 것인데 마을 이름을 한문으로 표기할 때 뜻을 잘 모르고 노오지(老吾地)로 했다는 것이다.

 

섬같은 독갑산 감옥터

독갑산(獨甲山)은 역굴(驛洞:多男洞) 새말 앞 벌판에 바가지를 엎어놓은 형국의 외따로 있는 작은 동산인데 고려 초 수주(樹州) 때 죄인을 수용하던 곳이라 한다.

산 주위를 파서 물이 고여 마치 섬과 같이 만들고 출입구에는 다리를 놓고 동산 전체가 감옥으로 죄인을 수용하였다고 한다.

 

선주지의 용마정

계양구 선주지(仙主地) 마을은 옛날 김해 김씨(金海 金氏)의 원주지라 전해온다. 이 마을 기슭에는 김씨들의 묘역이 있는데 자손들은 없고 여러개의 비석만이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

 

옛날 이 김씨 집에 시집온 한 부인이 장사아기를 낳았다. 그 때에는 장사가 나면 나라에 반역할 것이 두렵고 그로 인하여 부모가 벌을 받게 될까 무서워 장사아기를 죽여버리는 예가 많았다.

 

이 장사아기의 부모도 후환이 두려워 장사아기를 죽이려하다가 차일피일하고 있었는데 아기장사가 걷기 시작하더니 앞산인 독갑산(獨甲山)을 지나 계양산으로 도망쳤는데 이 때 용마정(龍馬井) 우물에서 용마가 나타나 이 장사아기를 태우고 어디론가 달아났다고 전한다.

독갑산에는 아기장사의 발자국과 손자국이 남아있다고 전해지기는 하나 그 사실을 알 수는 없다.

 

부평 매방과 충렬왕의 매사냥

이 습(李 褶)은 고려와 고종 후궁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자신이 국혼한 자라 칭하고 원종의 총애를 받아 많은 영화를 누렸는데 상서우승(尙書右承)이 되고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지어사상장군(知御史上將軍)을 역임한 간신이다.

 

고려시대에는 총이 없어 매사냥이 성행하였는데, 송도 한복판에 매방이 있었으나 민가의 닭과 개를 함부로 잡아죽이는 터에 이런 일로 큰 비난을 받았다. 이 때 이 습은 부하 박 향(朴 鄕)을 시켜 도성 안에 있는 매방을 다른 곳에 옮길 것을 지시하여 여러 곳의 후보지를 탐색한 결과 부평땅 경명현(景明峴) 부근이 적지라서 사육도가(飼育都家) 윤 수(尹 秀)로 하게하여 매방을 이전하여 매를 사육하였다.

문헌에 보면 충렬왕은 왕자시절 원나라에 볼모로 가서 매사냥을 배웠고 아주 즐겨했다고 하며 부평 매방에도 몇 차례 왕래한 기록이 나온다.

 

한번은 원나라 사신 달로화치와 더불어 많은 수행원을 대동하고 이곳 부평땅에 와서 매사냥을 하며 즐겼는데, 이 때 이습은 왕을 즐겁게 해주려고 윤 수를 시켜 미리 고니와 따오기 등의 배와 등털을 뽑아서 높이 날게 하고 매를 시켜 이를 잡아오니 왕은 이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그래서 충렬왕은 이 습을 총애하고 높은 벼슬을 내려주었으며 또한 부평골의 등급을 높여 길주(吉州)라 하고 자기가 죽으면 이 땅에 나를 묻어 달라고까지 하였으나 아들은 이를 반대하고 다른 곳에 능을 썼다.

 

계양구 문화재 ‧ 산 ‧ 황어장터

 

부평도호부청사(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호)

원래의 도호부청사는 재북부2리(계산동 898번지)였으며 현재는 계산동 943번지 부평초등학교 내에 옛 청사건물이 변형은 되었으나 일부가 남아 있는데, 이곳에는 계산동은행나무(시지정기념물 11호), 욕은지(시지정 문화재자료 1호), 어사대(시지정문화재자료 제3호)의 흔적이 도호부청사 앞에 남아 있다.

 

부평도호부청사는 숙종 3년(1677)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세워진 내력을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고려시대 의종 4년(1150)에 안남도호부로 고종2년(1215)에 계양도호부로 조선시대 태종 13년(1413)에 부평부가 부평도호부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모든 정황으로 볼 때 부평도호부로 승격이 되면서 청사 건립에 착수하여 약 5년후(태종 18년, 1418)에 완공된 것으로 보여진다. 청사옆에 보호되고 있으며 이때 풍치목으로 심어진 듯한 은행나무의 수령이 약 600여년쯤 되는 것과도 일치한다.

 

기록에 의하면 객사, 동·서헌, 삼문, 근민당, 좌·우익랑, 동·서책방, 사령청, 향청, 포도청, 훈무당, 부창등 총 23동 23칸으로 당시에는 웅장한 규모였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내아만 남아 있고, 원래는 “ㄱ”자 건물이였으나 1968년 현 위치로 이동하면서 “ㅡ”자건물로 바뀌어 정면 6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도리집이 되었다.

 

부평향교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12호)

부평향교는 현재의 경인교육대학교에서 북쪽으로 약 2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인종 5년(1127)왕명에 따라 수주(樹州)향교가 계양구 오류동 산4번지에 세워졌는데 당시 전국 56주가 모두 이에 따라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수주의 후칭인 안남도호부가 의종 19년(1165) 계산동(온수골)으로 이전됨에 따라 당시 안남향교도 안남산 남쪽(현재 계산2동 한우리 아파트 부근)에 이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 충선왕 2년(1310) 부평부가 되면서 부평향교로 고쳐 불러왔고 병자호란(1636)을 맞아 문묘 건물이 완전히 소실되었으나 조선 숙종14년(1688)에 현재의 위치에 문묘를 재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평향교에는 명륜당, 재실등 교육시설을 앞에 놓고 그 뒤에 대성전과 동·서무의 문묘시설을 둔 우리나라 향교의 전형적인「전당후묘」의 형식이다. 열성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대성전과 동·서무, 동·서재는 맞배지붕형식으로 되어 있고, 명륜당은 팔작지붕이다. 중국성현5성위와 한국18현을 모신 석전대제는 매년 음력 2월과 10월 초정일에 봉해하고 있다.

 

옛 욕은지 인천시 문화재 자료 제1호
욕은지(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
)

부평초등학교 도호부청사 뜰에 있는데, 동쪽 방향에 있던 것을 고종24년(1887)에 보수하여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연못은 동서의 길이가 18m남북의 길이가 16m로 사각형의 장대석을 쌓아 만들어 동쪽 축대 가운데 욕은지광서정해(浴恩地光緖丁亥)라고 음각된 돌이 끼워져 있는데 고종 24년(1887) 부평부사 정병하(鄭秉夏)가 보수한 것으로 욕은지는 인조가 그의 생부 원종(元宗)의 능이 있는 김포 장능에 전배할 때 이곳 부평도호부에 들러 활을 쏘고 어사대 이 못에서 손을 씻었다고 전해지나 인조가 아버지의 능을 이곳으로 이장하기 위하여 극비리에 답사하였다는 설은 있으나 공식적으로 부평에 행차한 적은 없다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계양산성(인천광역시기념물 제10호)

인천의 진산인 계양산(해발 394.9m) 주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쪽으로 뻗어내린 230m지점인 계산동 산10번지 작은 봉우리에 위치해 있는데 계양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석성으로 축조양식은 퇴뫼식, 성벽은 내탁식이다.

 

고산성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성은 축조한지 1500여 년이 지난 현재 석벽이 모두 허물어지고 축성형태가 남아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에 의하면 석축 1,937척이나 퇴락되었다고 쓰여져 있으며 실측결과 산성의 총길이는 1,180m(계양산성지표조사보고서) 성곽의 외부는 잘 다듬어진 돌로 5m높이로 쌓아 올렸다.

 

동북으로 한강유역의 김포 평야와 남서로는 서해의 관문인 인천항, 수도 서울과의 연결교통 요충지인 이곳은 옛부터 군사적, 경제적 주요한 수로 교통의 요지로, 기본적인 지리적 여건이 외적방어와 북풍을 막을 수 있는 배산임수라는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어 군사상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산성이면서 불쑥 튀어나온 능선 중간부분을 중심으로 축조되어 성내가 사방으로 노출되는 특이한 성이다.

현재 산성의 복원을 위해 발굴 조사 중에 있으며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로는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계양산성 발굴조사

인천시지정 기념물 제10호인 계양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시기(6세기 중엽)에 축조된 성곽으로 오랜 세월이 흘러 현재는 성벽의 일부만이 남아 있어 계양구에서는 계양산성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2001년 인천시에서 계양산일대 문화재 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이를 토대로 하여 계양산성 발굴조사 작업을 제4차에 걸쳐 연차별로 시행할 계획으로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계양산성을 원형대로 복원할 계획이다.

 

계양산성 제1차 발굴조사

2003년 8월 1일부터 10월 27일까지 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소장 이형구 교수)에서 서문지 일원(육각정 옆)에 대하여 제1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발굴결과 서벽 구간은 성의 높이가 7m정도로 추정되고, 두께는 4m로 확인되었고, 성의 외벽은 잘 다듬은 돌로 기울기가 거의 수직으로 쌓았으며, 내탁은 할석으로 견고하게 쌓고 외벽으로 기저부에는 보축한 시설이 남아 있습니다.

 

출토된 유물은 6m×12m라는 좁은 조사 면적에서 다양하고 많은 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외와편은 암기와, 수기와, 구연부편, 파수부편, 광구호편 등 1.5톤 트럭에 가득 담을 정도로 수습되었고, 철기류는 철촉, 철정, 칼, 철제이기 등 53점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철기류의 시기는 백제시기 혹은 고신라시기로 추정하고, 토기류 또한 다양한 파편들이 나왔는데 고배류, 호루, 뚜껑류, 완류, 시루, 발형토기편 등 이 있고, 시루도 소량 출토되어 백제시기와 신리시기 토기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성의 구조와 수습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초축시기는 삼국시대 백제시기로 추정하고 있으며, 늦어도 고신라시기 즉 진흥왕이 한강을 장악한 6세기 중엽까지로 추정되었고, 추후 더 많은 발굴조사를 통하여 정확한 연대를 확인할 계획이다.

 

계산동은행나무(인천광역시기념물 제11호)

현재 부평초등학교 교정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종 18년(1418) 부평도호부청사 완공시 풍치목으로 심었던 것으로 보여지며, 수령은 약 580~600년, 높이 25m이다.

 

영신군(永新君) 이이(李怡)묘(인천광역시기념물 제43호)

작전2동 산2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 태종의 둘째아들인 효령대군의 의성군 손자이자 채(寀)의 여섯째 아들인 이이는 단종2년(1454)에 출생하여 왕족으로서 종실과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워 정의대부 영신군에 봉해졌으며 중종21년(1526) 73세로 사망하였다.

 

영신공원(永新公園)으로 조성된 묘역은 그 의 묘를 비롯한 가족묘 10여기가 위치하고 있으며 첫째 아들인 명원군(明原君)의 묘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에 따로 있고 둘째 아들인 함원군(咸原君)의 묘가 이곳에 있다.

 

함원군(咸原君)은 경학에 밝고 정직 청백하고 어전에서 치평지도(治平之道)를 건의하기도 하였는데, 그가 사망하자 명종(明宗)이 승지 홍대협을 통하여 술과 제문을 내리기도 하였으며 각묘의 묘갈과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조선시대 왕실 묘제와 시제 그리고 미술 공예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찰, 이율 형제정려(인천광역시기념물 제52호)

세종대왕의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후손인 전주이씨 이찰과 이율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병환이 나자 곁을 떠나지 않으며, 백방으로 약을 구해 극진히 간호하였으나 차도가 없이 위독해지자 형제가 번갈아가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입에 넣어 드렸으나 끝내는 사망하여 묘막을 짓고 3년 간의 시묘를 살았는데, 이후 아버지께 못한 효도를 유감스럽게 생각하여 어머니를 더욱더 극진히 모셨는데 형제가 나이 40이 가까워오자 어머님 또한 노환으로 위독해지자 아버지께 하였던 대로 똑같이 행하였으나 보람없이 운명하자 애통해하며 장례를 치룬 후 다시 묘막을 짓고 3년 간의 시묘살이를 했다.

 

나라에서는 이를 알고 현종 11년 (1670년)에 벼슬과 함께 효자정려를 내렸다. 이찰 · 이율 형제의 효자정려는 두 분의 묘소가 있는 계양구 갈현동 산73-6번지에 있다.

 

계양산(桂陽山)

 

 

계양산은 해발 395m로 인천을 대표하는 진산(鎭山)이자 주산(主山)이다.

계양은 과거 기원초부터 19세기말까지 읍치(邑治)가 계양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쪽 삼국시대 고현읍(古縣邑)에서 시작하여 북쪽 그리고 동쪽으로 이동하며 마지막 남쪽 조선시대 부평도호부읍(富平都護府邑)에 이르기까지 여섯번 환천(換遷)을 하면서 발전하고 번창했다.

 

계양산 동쪽 기슭 봉우리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계양산성(桂陽山城)이 있고, 서쪽으로는 조선 고종 20년(1883년)에 해안방비를 위해 부평고을 주민들이 참여하여 축조한 중심성(衆心城)이 징매이고개(景明峴) 능선을 따라 걸쳐 있었다.

 

계양산이란 이름은 지명의 변천에 따라 고려 수주 때에는 수주악(樹州岳), 안남도호부 때에는 안남산(安南山), 계양도호부 때에는 계양산(桂陽山)으로 부르던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한 때는 아남산(阿南山), 경명산(景明山)이라고도 하였다.

 

계양산의 산명 유래는 계수나무와 회양목이 자생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1944년 1월 8일 인천시 최초의 도시자연공원(계양공원)으로 결정되고, 그 후 계양산은 시지정 제1호 공원이 되었다.

 

천마산(天馬山, 226m)

계양구 효성동 서쪽 가정동 뒷산을 천마산이라 부른다. 이 산중턱 큰 바위에 말발굽자국이 많이 새겨져있기 때문이다. 또한 산 계곡을 용마(龍馬)가 난 골이라 용마골이라 부른는데 이 산에서 천마가 나왔다고 전해온다.

 

1916년경 조선총독부는 산지측량을 할 때 철마산(鐵馬山)으로 잘못 표기하여 모든 지도에 철마산이라 표기되었다.

 

원통산(圓通山, 怨通山 160m)

인천과 부평을 연결하는 경인국도를 가다가 원통이고개의 산을 모두 원통이으로 부른다.

조선 중기 정승 김안노가 경인운하를 시도하다가 원통이고개를 뚫지 못하니 원통하다 하여 원통산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황어장터와 만세운동

잉어의 산지라 기명하여 그 이름이 붙여진 황어장터는 5일장으로 조선시대부터 잡화 및 곡물뿐만 아니라 1일 200여 두의 거래가 이루어진 소시장으로 이름이 난 곳이다.

1910년대에는 더욱 확장되어 1일 소거래량이 500~600두에 이르렀으며 이용주민이 1,000명에 달하는 인천지역의 대표적인 시장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3.1운동 당시 장날을 이용하여 수백 명이 만세운동을 일으켜 인천지역에서 가장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되었으며 강서지방에서 최초의 만세운동로 전해지고 있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한민족은 국내외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거족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계양주민들도 3월 24일 오후 2시경 오류리의 심혁성의 주도하에 장기리 황어장터 장날을 이용하여 6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힘껏 외쳤다.

 

황어장터의 만세운동은 인천지역에서 전개된 가장 대규모적인 만세운동이었으므로 당황한 일제는 심혁성을 체포하는 한편 이의 진압에 적극 나섰다. 이에 장기리의 임성춘 등 주민 600여명은 만세운동과 더불어 체포되어 가는 심혁성의 탈환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부내 경찰관 주재소 일본순사는 칼을 빼어 휘둘러 선봉에 섰던 선주리의 이은선을 즉사케 하고 윤해영에게 부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이은선의 피살 소식이 전해지자 이담, 최성옥, 전원순, 이공우 등 천도교인, 기독교인, 일반 농민 등이 주축이 되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한편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고자 하였다. 격분한 계양주민 100여명은 우선 선주지리에 있는 면사무소 서기 이경응이 친일적인 협의가 있다고 보아 그의 집으로 달려가 집을 부수어 민족정기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으며 주민들을 억압 탄압하던 면사무소를 파괴하여 친일기관을 응징하고자 하였다.

 

만세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계양주민 40여명은 3.1운동을 전개하였다는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며, 그 중 이담은 징역 2년, 임성춘은 징역 1년, 최성옥과 전원순은 각각 징역 10월, 심혁성은 징역 8월에 처해졌다.

 

당시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심혁성(오류동)은 1년여의 옥고를 치루고 논과 밭 그리고 집을 팔아 생필품을 장만하여 장터에서 빈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처자를 거느리고 산골로 은신, 전국 심산유곡을 30년 가까이 방랑하며 약초를 캐어 연명하면서 한편으로는 만주 등지를 내왕 애국지사들과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그 외에도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했던 33인의 일부 후손들이 아직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으며 황어장터의 만세운동은 계양 주민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자긍심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천지역, 나아가 전국의 만세운동에도 견인차 역할을 전개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애국지사들은 다음과 같다.

김영권 김창열 박문칠 배응준 송광현 심혁성 안윤필 유석기(유연봉), 윤해영 이공우 이금산 이담(이태현) 이은선 이태완 임성일 임성춘 임창현 전기순 전봉학 전사삼 전상근 전원순 전천능 정태용 조성칠 채귀현 채규명(채상현) 채봉운 채봉혁 채흥봉 최성옥 최청일 홍여선

 

 

함께 살아가요! 계양(桂陽)의 현재

 

 

계양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경치는 백만가지의 그림이다. 계양구의 주택들 멀리보이는 인천 항구, 서해 영종도, 강화군 마니산, 김포 반도와 문수산, 일산 고양시, 경인아라뱃길과 한강, 김포공항과 부천시, 서울 북한산과 남산 ․ 관악산, 경기북부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장관을 이루며 교통과 군사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이곳 계양산 아래 계양구는 오늘도 유치원생의 병아리색 스쿨버스를 타는 모습부터 초 ‧ 중 ‧ 고‧ 대학생들의 공부소리, 생동하는 구민들의 웰빙, 문화와 경제 발전을 위한 분주함이 하모니를 이룬다.

 

계양문화회관

계양문화회관은 계산동 724번지, 공연장 808석으로 무대시설로 주무대(60평), 보조무대(60평), 오케스트라핏트(50석), 바튼 9개, 무대조명 에프론탑라이트 18대, 팔로우핀 스포트라이트 2개, 보더라이트 36대, 무대음향 컴퓨터 콘솔 2대, 엠프 19개, 마이크 27개, 녹음기 4대, 에코 발생기 2대, 음향 반사판 10조 등 첨단시설을 갖춘 계양구문화의 전당이다.

 

야외공연장

계양구 야외공연장은 계양구 작전동 902번지,

시설규모 359.07㎡(무대 182.4, 대기실 39.20, 홀 83.4, 화장실 54.0), 주요시설은 무대음향, 무대조명 등이다.

 

청소년수련관

계양구 청소년수련관은 영화상영, 기획공연, 도서실운영, 도서실열람 288석,

취미교실·문화교실운영(컴퓨터교실, 사물놀이, 단전호흡, 스포츠댄스, 생활영어, 생활일본어, 택견, 신문만들기, 종이접기 등)과 상담실 청소년 고민상담, 청소년 체력단련을 할 수 있는 청소년들의 전당이다.

 

계양도서관

계양도서관은 계산동 907-4, 대지5,500㎡, 건축연면적5,882㎡, 열람좌석수1,387석으로 계양구 청소년과 일반인들의 배움의 전당이다.

 

어린이과학관

계양구 방축동 부지 2만1천688㎡에 774억원을 들여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이다.

어린이과학관은 유치원생,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어린이체험과학관, 전통과학관, 자연사과학관 등과 함께 야외 편의시설을 갖추게 된다.

전국 최초의 '어린이과학관'으로 2011년 4월 완공됐다.

 

계양구 양궁

계양구 직장운동경기부인 남자 양궁선수단은 1996년 4월 25일 창단되어 그동안 올림픽,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안게임과 국내외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국가대표 감독, 코치, 선수 등을 지속적으로 배출하여 우리나라 양궁을 이끌고있다.

 

서거원 감독(전 국가대표 감독), 박성수(88올림픽 금메달)코치를 비롯한 6명의 선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2007년 전국체육대회 단체종합우승 및 한국신기록을 수립하여 최우수단체상을 수상하는 등 창단 이후 국제대회 국내대회에서 다수의 입상으로 국위 선양은 물론 우리구 위상을 드높였다.

 

2014년 아시아게임 유치로 우리 구에 양궁경기장 조성 계획으로 ‘양궁’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지는 가운데 우리 양궁선수단은 앞으로도 우리 구의 위상을 드높이고 나아가 한국 양궁 발전의 초석이 되도록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계양종합경기장 건설

2014년 아시안게임을 맞추어 양궁장 등 다양한 경기장이 조성되어 웰빙의 도시로 구민들의 풍요를 더한다.

 

 

서부간선수로 생태공원 조성

서부간선수로 생태공원 조성은 계양구 서운동 신용종교 - 부평구 삼산동 굴포천 연결부까지 총 2.8km를 생태친수공간으로 조성하는 계획이다. 현재 인천시가 주관하고 한국농어촌공사 김포지사가 사업을 시행하고 있으며 2012년 12월까지 완료할 것이다.

 

계양구 계양산 사직제 봉행

초헌관으로 이익진 계양구청장, 아헌관으로 이준홍 계양구의회 의장.

이익진 전 계양구청장은 2009년 11월 10일 계양문화원 주관으로 개최된 계양산 사직제에서 초헌관으로 사직제를 봉행했다.

 

사직제는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농작의 풍년을 좌우하는 곡식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드리는 제례로서 금년 한해 풍년에 대해 감사하고 구민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한편, 전통 고유문화를 지켜나가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사직제에는 초헌관으로 이익진 계양구청장, 아헌관으로 이준홍 계양구의회 의장, 종헌관으로 이용호 노인회장이 제례를 봉행했다.

 

계양구 계양산 산천제 개최

풍년 감사하며 구민의 안녕과 발전 기원

계양구(구청장 박형우)는 2010년 11월 4일 계양문화원 주관으로 계양산 도당에서 산천제를 봉행했다.

이날 산천제에는 박형우 구청장이 초헌관으로, 조동수 계양구의회 의장이 아헌관으로, 송형식 노인회장이 종헌관으로 제를 올렸다.

산천제는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농작의 풍년을 좌우하는 곡식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드리는 제례로써 금년 한해 풍년에 대해 감사하고 구민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한편, 전통 고유문화를 지켜나가기 위해 마련됐다.

 

인천시 계양구 65주년 광복절 기념

제50회 동(洞)화합 축구대회

지역문화 축구제전으로 발전

한국의 축구는 전국 방방곡곡 마을마다 기나긴 역사속에서 우리의 추억이 되었고, 시대가 변한 현대화된 이제 각 지역마다 큰 문화의 축을 이루어 국력의 근본을 이루고있다.

 

 

 

인천광역시 북단 계양산 아래 35만여명이 살고있는 계양구에는 매년 8월 15일에만 개최되는 50년전통의 축구대회가 있어 계양구민과 인천시민 그리고 전국에 알리며, 이곳 지역 문화로 정착된 축제를 함께느껴 보고자한다.

 

2010년 8월 15일, 제50회 동화합 축구대회가 경인교육대학교, 부평초등학교에서 함기문 대회장, 박형우 계양구청장, 조동수 계양구의회 의장, 신학용 국회의원, 이상권 국회의원, 이익진 전 구청장, 김희갑 민주당 계양을 위원장, 조순업 계양구보훈경로회장, 김성정 ‧ 김진응 ‧ 임종기 ‧ 이정도 ‧ 전봉운 ‧ 김창식 ‧ 김혁정 ‧ 김승회 ‧ 김두환 전대회장, 이도형‧ 이용범‧ 이한구 시의회의원 김영태 교육위원, 이용휘 계양구의회 부의장, 김석현 ‧ 한양진 ‧ 김유순 ‧ 곽성구 ‧ 윤환 ‧ 박명숙 ‧ 노정희 ‧ 민순자 ‧ 전선경 계양구의회 의원, 이건영 계양문화원장, 이종민 전의원, 최원석 변호사, 윤대기 변호사, 조정재 새천년 장례식장 대표이사, 이임효 계산동 새마을금고 이사장, 황순남 계산동 청년회장, 윤명언 초대 계산동 청년회장, 김지영 언론사 방방곡곡 대표, 15개팀 임원 선수와 내빈 1,000여명이 함께한 가운데 개회식과 대회가 거행되었다.

 

송영길 인천시장은 시 광복절 공식 행사로 늦게 경기장을 방문하여 관계자 및 선수들을 격려하였다.

이번 대회의 대회장 함기문 계양구 경영자협의회장은 “이 대회가 어느덧 단순한 지역대회 차원을 넘어 인천시민의 정서 함양과 애향심을 고취시키는 전통 있는 지역문화 축구제전으로 발전하였다”며 “이번 대회를 통해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는 물론 지역주민들이 더욱 큰 애향심을 가지고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는 경인교육대학과 부평초등학교에서 나누어 거행하였으며 평소에 조기축구회에서 쌓은 실력을 발휘하여 정정당당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지역축구가 인천 및 국가 축구의 기본 바탕이 됨을 보여주었다.

 

윤명언 초대 계양청년회장은 이번 제50회 동화합 축구대회의 역사를 1957년 이곳 마을 대항 4개팀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다. 꼭 8월 15일에 대회를 열었으며 대회때는 마을 집집마다 다니며 쌀과 500~1,000원의 후원을 받아서 대회를 했으며 마을마다 우마차로 음식을 준비하여 동네잔치로 많은 주민들이 동참하는 대회였다고 한다.

 

그리고 정식적으로 1961년 제1회 대회를 갖게되어, 계산동 A팀이 우승, 계산동 B팀이 준우승 하였고, 점차적으로 동화상협, 수도피아노, 동성합판 등 기업팀들도 함께하는 대회로 발전하였다 한다.

현재 부평초등학교 600년된 은행나무는 예전에는 운동장 가운데 있었으며 긴 세월 축구대회를 지켜보았고, 50년이 지난 현재에도 같은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하였다.

 

이번 제50회 동(洞)화합 축구대회는 우승 계산청년회(A조), 준우승 계산1동(B조), 장려상 계양1동(임학축구단), 작전1동(한우리 축구단), 득점상에는 김경열 선수가 6골을 기록하였다.

 

대회 축시

 

가장 찬란한 기쁨

해방되어 찾아오던 날 통곡이 환희로

환희가 소망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구나

50년 전

부평벌의 모임이

 

발로 발로 진실로 진실로

이어져 올 때

우리는 이 고장

 

참 일꾼들

아름다운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넓은 가슴으로

서로를 안아주는

그 뜻, 그 사랑

 

이 광장에 어울어지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여

성스런 계양의 아들들이

 

이 나라의 千里馬이게 하소서

이 민족 이끌어 갈 젊음되게 하소서

 

 

 

제16회 계양구청장기 축구대회

가족과 이웃, 팀과 선수간 소통 화합의 시간

계양산이 병풍처럼 보이는 경인교대 교정에서 2010년 10월 17일 제16회 계양구청장기 축구대회가 임학 축구회를 비롯하여 42개 팀이 출전, 계양지역 활발한 축구문화를 보이며 정정당당한 대회가 진행되었다.

 

계양구청이 주최하고 계양구축구연합회가 주관하는 이번 대회는 오전 8시부터 예선전이 진행되었고 10시에는 경인교대 운동장에서 개회식이 있었다.

 

박재광 계양축구연합회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개회식에는 김두환 계양축구연합회장, 박형우 구청장, 조동수 계양구의회 의장, 신학용 국회의원, 이상권 국회의원, 오성규 계양구 생활체육회 회장, 이용범 ‧ 홍성욱 인천시의회 의원, 최원식 인천계양 을 민주당 지역위원회 위원장, 윤환 ‧ 곽성구 ‧ 민순자 ‧ 박명숙 ‧ 김석현 ‧ 노정희 계양구의회 의원, 문병호 백승부대 연대장, 함기문 계양구 경영자 협의회 회장, 강윤구 계산동우회 회장, 김지영 언론사 방방곡곡 대표 등 계양축구관계자 및 지역 유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김두환 회장은 오늘은 계양축구인 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즐거운 축구 한마당을 벌이는 뜻 깊은 날로 한분도 다치는 선수없이 기량을 마음껏 선보이며 서로간의 침목을 다지는 축제의 시간을 만들자고 말하였다.

 

박형우 구청장은 17세 이하 여자월드컵 우승 등 국가적으로 우리나라의 축구가 세계에서 상위권의 위상속에서 계양구 축구는 계양축구연합회가 중심이 되어 선수 저변확대와 생활체육으로서 굳건한 뿌리를 내리고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이번 대회를 통하여 서로 소통 화합으로 따뜻한 정을 나누는 기회를 만들자고 말하였다.

 

또한 조동수 계양구의회 의장, 신학용 국회의원, 이상권 국회의원, 오성규 회장은 계양구 축구발전과 주민들간의 친선이 이번 축구대회를 통하여 실천되고 있다며 관심을 표현하였다.

 

이번 대회는 각 축구팀이 가족들도 함께 입장하며 평소 아빠들이 조기축구회에서 기량을 닦은 모습을 입장식과 경기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운 장면을 엿볼 수 있었다.

 

임학축구회 홍규용 회장은 부인과 아들 딸 두 자녀와 함께 참여, 준우승을 목표로 열심히 뛰어보겠다고 힘찬 의지를 보였다.

 

이번 출전 팀은 계양60대 축구회(회장 이영서), 계양FC 50대 축구회(회장 권전택), 계산 축구회(회장 이종광), 계동 축구회(회장 양승국), 기동대 축구회(회장 김석설), 백두산 축구회(회장 임광수), 비너스 축구회(회장 이애란), 비천 축구회(회장 여운호), 상우 축구회(회장 유승철), 서운 축구회(회장 김광배), 수양 축구회(회장 김지철), 수주 축구회(회장 이준기), 아주 축구회(회장 최성만), 안남 축구회(회장 이승주), 인효 축구회(회장 임상지), 일출 축구회(회장 이선형), 임학 축구회(회장 홍규용), 작전 축구회(회장 이길환), 제이씨 축구회(회장 최윤환), 조은 축구회(회장 장광식), 청록 축구회(회장 안형준), 태산 축구회(회장 차명근), 학사장교 축구회(임서현), 한우리 축구회(회장 정상교), 청심 축구회(회장 구왕서), 명현 축구회(전재욱), 한가람 축구회(회장 전재남), 화목 축구회(회장 고재관), 화림 축구회(회장 권오훈), 엠피스 축구회(회장 한만서), 경영자협의회 축구회(회장 김명철), 부현동 축구회(회장 이용재), 계암 축구회(회장 김진현), 또래 축구회(회장 이종섭), 훼밀리 축구회(회장 권향휘),한마음 축구회(회장 권성원), 계양구청 축구회(회장 장정석), 금강제화 축구회(회장 임각진), 작전매매 축구회(회장 서동진), 계양소방서 축구회(회장 황영호), 백마택시 축구회(회장 이흥길), 한마음택시 축구회(회장 이문수) 등 이다.

 

인천 계양구, 명품 산책로 조성

벽천분수, 문화조형물 등 설치, 각종 문화이벤트 공간을 조성

계양문화의 거리 ‣ 계산현대 아파트 벚꽃거리 ‣ 경인교육대학교 ‣ 부평향교 ‣ 계양문화회관 ‣ 계양산

계양문화의 거리 조성사업은 부족한 문화공간을 확충하고 지역을 대표할 수있는 랜드마크로 육성하기 위하여 계양구청에서 이마트 계산점까지 800m를 대상으로 기존 4차로를 1차선 일방통행로 축소하고 보행자 중심도로로 개선하는 경관조성 사업이다.

 

이 사업은 벽천분수, 문화조형물 등을 설치되고 각종 문화이벤트 공간을 조성하는 한편, 까치공원, 작전체육공원을 정비해 오픈스페이스와 가로녹지 확보를 병행하며 ‘간판이 아름다운 거리조성 사업’과 연계하여 아름답고 개성있는 명품가로를 조성한 사업이다.

 

아울러 계양문화의거리, 계산현대아파트 벚꽃길에서 계산전통재래시장, 경인교대, 부평향교, 계양문화회관, 계양산을 연계하는 문화산책로는 계양구의 보배로운 자산이다. 앞으로 계양구의 적극적인 조성사업을 기대해본다.

 

계산동 현대아파트 벚꽃 축제

20여년전 계산동 현대아파트가 지어지면서 단지내 조성된 벚꽃나무 500여그루가 봄이되면 만개하여 꽃구름을 이룬다.

 

이제 벚꽃나무가 심어지며 잉태된 아이들은 중고등학생, 대학생이되어 눈처럼 덮인 꽃잎을 지려밟고 데이트하는 계양의 아들 딸이 되었으니 이곳이 우리의 웰빙, 문화 경제의 고향임을 나타낸다.

 

 

계산중앙교회 창립110주년 축하 음악회

계양의 색다른 종교문화 창달

인천시립교향악단 감동의 연주

성숙한 시민들의 감상모습 경건하여

봄이 무르익어 가는 인천, 계양산 아래 계산중앙교회(기독교 대한감리회)에서는 2010년 3월 20일 창립110주년을 맞아 최세웅 감독, 최신성 담임목사와 표덕만 장로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인천시립교향악단을 초청하여 음악회를 가졌다.

 

이날 음악회에는 계산중앙교회 어린이 합창단이 ‘주님이 주신 노래’, 청음한 소리로 음악회를 시작하였고, 최신성 담임목사는 음악회를 여는 인사말에서 지난 110년 동안 저희 계산중앙교회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그간 믿음이 선조들의 큰 사명감으로 오늘의 이 자리가 마련되었다며 이경구 지휘자와 표덕만 장로의 노력에도 감사를 표했다.

 

이번 음악회로 계산중앙교회 대예배당은 현대적 건물로 거대한 음악당으로 재탄생되어 인천시립교향악단의 웅장하고도 절묘한 음색 하나 하나를 표현할 수 있는 성스런 장소로 변해있었다.

 

연주된 작품으로는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 작품. 26, 레하르 작곡 왈츠 ‘금과 은’ 작품.79/브루흐 작곡 ‘신의 날’ 작품. 47 (신수정의 첼로 연주와 협연), 소프라노 김인혜의 하나님의 은혜, 평화를 주소서(오페라‘운명의 힘’중에서), 테너 신동호의 ‘주의 기도’, ‘남몰래 흐르는 눈물’ (오페라 ‘사랑의 묘약’ 중)이 연주되었으며 이경구 지휘자의 곡해설과 구수하며 음악성있는 설명으로 1,000여명의 남녀노소 청중 개개인 마음안으로 스며들게 하였다.

 

깊어져가는 계양의 봄 밤에 드볼작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마단조, 작품 95를 연주할 때에는 거대한 성당이 성스런 악기로 변하였고, 110년간 계양산 아래서 계양의 신세계를 개척한 계산중앙교회의 종교문화의 성숙미로 승화시켰다.

 

한편 계양구에는 천주교, 감리교, 장로교, 사찰, 원불교, 무속신앙 등 다양한 종교문화가 어울려 구민들의 행복과 평안을 더하고있다.

 

계양구 다문화가족 지원센터 확장이전 개소

결혼이민자 한국사회 조기적응 지원

계양구에서는 계양구 노동복지회관에서 ‘다문화가족 지원센터’의 이전 개소식을 개최했다.

구에 따르면 ‘다문화가족 지원센터’는 계양구에 1,000여 세대의 결혼 이민자 가족이 있어 지난해 3월 결혼이민자 가족지원센터로 출발하여 그간 국어와 자녀양육교육, 가족화합프로그램 운영 등 결혼이민자의 조기정착과 가족간 문화적 차이 극복을 위한 사업을 추진해 왔으며 센터등록 이용자가 800여명에 이르러 각종 프로그램 추진을 위한 공간확보가 절실해짐에 따라 노동복지회관으로 이전하게 됐다.

 

한편, 계양구는 “이국 땅에서 새로운 가족을 구성한 결혼이민자가 사회, 문화적 차이점을 빠르게 극복하고 우리 사회에 조기정착 할 수 있도록 다각적인 지원과 프로그램을 개발”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인천, 계양구 소재 ‘지선사’

이웃돕기 성금 1천 200만원 기탁

2010년 2월 설 명절을 맞아 계양구 계산동에 소재한 지선사(주지 덕환스님)는 신도들이 정성껏 모은 1,200만원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계양구청에 1천만원, 계산2동 주민센터에 200만원씩 기탁했다.

구에서는 기탁 받은 성금을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와 차상위계층 가정 등 소외계층을 위문하는데 사용할 방침이다.

 

인천시, 계양구 민선 5대 박형우 구청장 취임

“역동적인 계양, 희망찬 행복도시”비전 제시

인천, 계양구 지방자치시대 민선 제5기의 서막이 올랐다.

계양구는 1일 오전 10시에 구청광장에서 국회의원, 유관기관장, 시의원, 구의원, 각 동 자생단체장, 주민과 공무원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박형우 신임 계양구청장 취임식을 가졌다.

 

이날 이른 아침 간부공무원들의 영접을 받으며 출근한 것으로 4년 임기를 시작한 박형우 구청장은 구청장실에서 간부공무원들과 담소를 나눈 후 취임식장으로 향했다.

 

취임식은 구청장 약력소개, “주민의 복리증진과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구청장으로서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 다짐하는 취임선서와 취임사, 꽃다발 증정, 대통령 축하메시지 낭독 등의 순서로 1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박형우 구청장 취임사에서의 △글로벌 교육중심 인재육성 △활력이 넘치는 지역경제 △자연이 어우러지는 Green-도시 △희망을 나누는 복지구현△ 구민과 소통하는 열린행정의 다섯 개의 구정목표를 밝히면서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하였다.

 

한편, 박형우 구청장은 취임식이 끝난 후에 구청장실에서 5급 이상 간부공무원들의 신고를 받았으며 오후에는 구청 브리핑룸을 방문하여 20여분 동안 취임 기자회견을 갖고 취임소감과 앞으로의 포부를 밝히고, 구정운영 방향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였다.

 

경인아라뱃길 생태통로 조성

계양산~징미산, 꽃매산 연결 생태로 조성해야

계양산 징매이 생태터널이 교훈

 

 

인천과 김포반도를 지난는 한남정맥은 남쪽으로는 계양산-징매이 생태터널-중구봉(효성산)-철마산-천마산-원적산-호봉산-약산-만월산-철마산-거마산-성주산-소래산으로 흐르고 북쪽으로는 계양산-징미산-계목산-묘지산-고산-금정산-황화산-가현산-필봉산-학운산-것고개-문수산에서 정점을 찍는다.

 

한남정맥이지나는 김포시와 인천광역시는 대규모 아파트개발, 쓰레기매립지도로,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경인아라뱃길 공사로 이미 그 맥락이 상실되어있어 뜻있는 사람들을 안타깝게한다.

조금만 더 생각을 하면서 개발을 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계양산과 효성산을 연결하는 징매이고개 생태터널을 뒤늦게나마 큰 돈을 들려 복원한 교훈이 있지않은가?

이제라는 정부와 김포시, 인천광역시는 도시개발과 경인아라뱃길을 만들때 생태를 연결하는 통로를 생각하며 공사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정부의 멋진 용단을 기대한다. 한남정맥을 단절한 경인아라뱃길,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와 전철을 다음 세대에게 무거운 짐을 주지말고 지금 공사진행중에 설계변경과 추가공사로 생태길를 만들어 세계적인 명품작품으로 만들어야겠다.

 

계양 웰빙 문화길 따라

1. 계양구청 ‣ 문화의 거리 ‣ 현대APT 벚꽃길 ‣ 계산전통재래시장 ‣ 부평 향교 ‣ 경인교대 교정

2. 계양구청 ‣ 문화의 거리 ‣ 현대APT 벚꽃길 ‣ 주부토길 ‣ 계산체육공원 ‣ 계양산

3. 연무정 ‣ 계양산 벚꽃길 ‣ 계양문예회관 ‣ 계양산 약수터 ‣ 계양산 삼림 욕장

4. 계양산 ‣ 징메이고개 생태터널 ‣ 철마산

5. 연무정 ‣ 계양산 허릿길 한바퀴

6. 연무정 ‣ 계양산성 ‣ 등선따라 정상으로

7. 계양산 백용사 ․ 성불사 ‣ 산길따라 한바퀴

8. 계양역 ‣ 계양산

9. 계양산 징매이생태터널 ‣ 중구봉(효성산) ‣ 철마산 ‣ 천마산 ‣ 원적산

10. 경인아라뱃길

 

계양 미래 행복의 빛

 

 

계양구는 계양산을 중심으로 미래 50~60만 인구가 모여 살아가는 웰빙, 역사문화와 경제중심, 교통중심, 수변 도시가 될 것이다. 여기에 행복한 고향을 만들고 후손을 탄생시키며, 계양사랑이 가족사랑, 이웃사랑, 나라사랑으로 이어져 나갈 것이다.

 

행정기관

계양구청/계양구의회/계양경찰서/계산1동주민자치센터/계산2동주민자치센터/계산3동주민자치단체/계산4동주민자치센터/계양1동주민자치센터/계양2동주민자치센터/작전1동주민자치센터/작전2동주민자치센터/서운동/효성1동주민자치센터/효성2동주민자치센터/계양구선거관리위원회/교통연수원/계양우체국/계양등기소/계양소방서/인천고용지원센터/인천북부지방노동사무소/북인천세무서/계양시설관리공단

 

교육기관

부평향교/경인교육대/경인여자대/계산고등학교/계양고등학교/계산공업고등학교/계산여고/작전여자고등학교/계산여자고등학교/작전중학교/병방중학교/부평초등학교/효성초등학교/작전초등학교/안남초등학교/병방초등하교/부현초등학교/길주초등학교/마리아유치원/예쁜유치원/인천미래유치원/자연유치원/인천예그랑유치원/카이저키즈어린이집/성요셉몬테소리/유송유치원/한우리유치원학교/가람유치원학교/가람유치원 자연유치원학교/영광유치원학교/한솔유치원학교/한솔유치원 밀알유치원학교/영광유치원/밀알유치원/으뜸유치원/정원유치원/유송유치원/마리아유치원/인천계양초등학교 상야분교 유치원/인천미래유치원/인천예그랑유치원/산들유치원/푸른유치원/인천해서초등학교병설유치원/경인여자대학부속유치원/청운선교유치원/보나유치원/석화유치원/초록나라유치원/서운초등학교병설유치원/인천소양초등학교병설유치원/계양초등학교병설유치원/서해유치원/미래유치원/성지초등학교병설유치원

 

2013년 안남초등학교 가을 체육대회

 

 

종교기관

계산중앙교회/천주교회계산동본당/천주교작전본당/노틀담수여원/까르멜수도원/계산교회/부평제일교회/계성교회/영천감리교회/효성중앙교회/단비교회/섬김교회혜인교회/함께하는교회/생명생교회/평강교회/아름다운교회/계암교회/은혜교회/시온교회/가나안교회/효성북교회/청운교회/부평방주교회/효성북부교회/주성교회/양무교회/다남교회/지선사/성불사/백용사/덕흥사/보국사/천호사/보현사/진운사/원불교부평교당/성산교회

 

복지기관

계양구계산노인문화센터 김명숙 센터장/구립계산노인복지센터 안원희 대표

 

체육문화기관

계양문예회관/계양구도서관/계양구여성복지회관/계양청소년수련관/벨로드롬/연무정/계양CGV/계산국민체육센터

 

언론, 법조계 (변호사, 법무사, 세무사, 공인중개사)

방방곡곡 뉴스(인터넷신문, 언론지) 김지영 대표/최원식 변호사/법무법인 로웰/윤대기 변호사/나재하 범무사/김생호 세무사 계산동/김상돈 세무사/하재선 공인중개사계양구/권중창 대표 한양부동산/이홍준 대표 진명 R&C

 

금융기관

계양신용협동조합 황원준 이사장/계양농협 신희철 조합장/계산신협 김진웅 이사장/MG새마을금고 이임효 이사장/국민은행/우리은행/신한은행/씨티은행/수협/북인천농협/부평농협 교대지점

 

계양 의료기관

의료법인 한림병원 이정희 이사장/인성의료원/성베드로병원/성민병원/인천한마음병원/연세차병원/김계선치과의원/굿모닝 정형외과/덕인한의원/신세계치과의원/방규태 내과의원/삼기당한의원 윤성묵 한의학박사/경희 삼대한의원 김승환 경영원장

 

전통시장, 음식문화

계산전통시장/작전전통시장/임학전통시장/롯데마트/삼성홈프러스/이마트/홈프러스/천년부페&웨딩홀/계양웨딩홀부페/카르르스타부페/미림출장뷔페/춘천 새술막 막국수/석화정 한정식코스요리 전문점/경복궁/삿뽀로/디종/임비곰비/전주돌솥밥/짐미일식/톰슨바닷가재/논골/염박사순대보쌈/씨탑/라보엠/마산아구민물장어/목포낚지/민속두부마을/유진참치회림일식/포도청/풍경/화로본가/교동해물탕/원주추어탕/초원순대 최진태/계양산 떡갈나무 전문점/황금동태 계산점/소문난 해장국 나한례(젬마)/착한낙지 박촌점 ․ 계산점/광주집 홍어전문

 

관광호텔

카리스호텔 대표 박은하/호텔 캐피탈/반도관광호텔

 

사업계

(주)새천년장례식장/이안 컴퓨터 경인교대점/WOOD GATE 호프 소주 커피 뮤직바(교대사거리)/태평양약국(교대사거리)/규수방/인천검도/이태리안경원 경인교대점/신창 부동산,인력개발/미국벨톤보청기/삼화페인트/조은요양사교육원/(주)카페베네 계산역점/현대종합상사/드리米 쌀화환/맨투맨 양복점/기아모터스/빵굼터/주)올케어/한가람 축산백화점/화성꽃백화점

 

단체모임(會)

계양구경영자협의회/계산동우회/계양구축구연합회/국제라이온스계양클럽/국제로타리계양클럽/국제로타리인천북부클럽/국제로타리3690클럽/국제로타리계산클럽/국제로타리안남클럽/계양영남향우회/계양호남향우회/계양강화향우회/축사모 협회 인천시회/(사)한국무에타이협회/계양구생활체육협회 댄스스포츠연합회

 

계양은 우리의 고향입니다.

 

 

박형우 계양구청장/이용휘 계양구의회의장/조동수 전 계양구의회의장/박희룡 전 계양구청장/이익진 전 계양구청장/신학용 국회의원/최원식 국회의원/이상권 위원장/조갑진 위원장/이용범 인천시의회의원/이도형 인천시의회 의원/한양진 계양구의회 의원/김석현 계양구의회 의원/박명숙 계양구의회 의원/노정희 계양구의회 의원/곽성구 계양구의회 의원/윤환 계양구의회 의원/김유순 계양구의회 의원/민순자 계양구의회 의원/전선경 계양구의회 의원/정광훈 계양구의회 의원 후보/홍춘식 계양구 시설관리공단 이사장/이재희 전 계양구의회 의원/강규석 계양구 의회 전 의원/김낙수 대표/봉두개 탤런트/김종득 계양구의원 후보/성용기 전 인천시의회의원/오성규 전 계양구 생활체육회장/김두환 전 계양구축구연합회장/박재광 전 계양구축구연합회 사무국장/유민선 계양구민의 봉사자/김광희 계양구 축구연합회 조직국장/정억규 계양구 축구연합회 홍보위원/이영서 계양60대 축구회 회장/권전택 계양FC 50대 축구회 회장/이종광 계산 축구회 회장/양승국 계동 축구회 회장/김석설 기동대 축구회 회장/임광수 백산 축구회 회장/이애란 비너스 축구회 회장/여운호 비천 축구회 회장/ 유승철 상우 축구회 회장/김광배 서운 축구회 회장/ 김지철 수양 축구회 회장/ 이준기 수주 축구회 회장/최성만 아주축구회 회장/ 이승주 안남 축구회 회장/임상지 인효 축구회 회장/이선형 일출 축구회 회장/홍규용 임학축구회 회장/이대호 임학축구회 총무/이길환 작전 축구회 회장/최윤환 제이씨 축구회 회장/ 장광식 조은 축구회 회장/안형준 청록 축구회 회장/ 차명근 태산축구회 회장/임서현 학사장교 축구회 회장/정상교 한우리 축구회 회장/ 구왕서 청심 축구회 회장/전재욱 명현 축구회 회장/전재남 한가람 축구회 회장, 고재관 화목 축구회 회장/ 권오훈 화림 축구회 회장/ 한만서 엠파스 축구회 회장/김명철 경영자협의회 축구회 회장/ 이용재 부현동 축구회 회장/ 김진현 계암 축구회 회장/이종섭 또래 축구회 회장/권향휘 훼밀리 축구회 회장/ 권성원 한마음 축구회 회장/ 장정석 계양구청 축구회 회장/임각진 금강제화 축구회 회장/서동진 작전매매 축구회 회장/황영호 계양소방서 축구회 회장/이흥길 백마택시 축구회 회장/이문수 한마음택시 축구회 회장/함기문 계양구경영자협의회 회장/김경하 인천계양의용소방대 대장/황순남 전 계산동 청년회장/신정수 축사모 문화위원장/손도형 한국무에타이협회 사무총장/김기환 ․ 정남석 ․ 한영애 ․ 이영미 BBGG 뉴스 기자/이선옥 영에어로빅 관장/권향란 계양의용소방대 대원/함선자 계양구 주민(코리아나 화장품)/차재경 계양구민/지상현 상현개발 대표/서정복 계양문화원 사무국장/이창만 계양구민/유연자 계양구민/김혜숙 계양구민/조영숙 계양구민/이태근 계양구민/권숙자 계양구민/박정순 계양구민/이옥분 계양구민/김선주 계양구민/조복현 계양구민/최양희 계양구민/안수관 계양구민/오석환(안드레아)천주교 인천교구 선교사/이명우 국민사다리/정덕삼 해군보통검찰부 검찰수사관/정춘철 계양구민/지춘식 그랜드포토스튜디오/봉재식 몽비쥬 병방동/김영진 구제로타리3690지구 총재/이기철 계양구민 등 343,118여 명의 자랑스런 계양구민이 있다.

 

계양산 해맞이

 

계양구 웰빙 • 문화 • 경제의 고향 만들기 함께해요.

 

리는 단 한번의 인생을 계양에서 함께 살아가며 커다란 인연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 애향심을 갖고 이웃을 돌아보며, 계양을 웰빙 . 문화 . 경제의 고향으로 만드는데, 계양구 전임 구청장의 업적, 계양구 각종 기관 단체, 사업체와 구민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계양구의 장점인 계양산 녹지공간, 경인아라뱃길 ․ 서부간선수로와 굴포천 수변, 서운일반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웰빙 산업과 문화예술 산업을 선도산업, 하드웨어로 하고 섬세한 행정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통한 소프트웨어를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면 수많은 일자리 창출을 통해 지역경제가 활성화 될 것이다.

 

이제 국민이 자강(自强)된 시대, 계양구민은 아름답고 실용적인 계양을 만들어 행복한 삶을 영위하며 희망찬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낼 것이다.

(참고 문헌, 계양사 2001.2.16, 계산중앙교회 110년사, 계양구 홈페이지, BBGG 뉴스, 계양구 8.15 광복절 축구대회 유인물 등)

 

계양산 해맞이 계양구민 가족

 

방방곡곡 뉴스 김지영(金智寧) 기자 www.bbggnews.com

 

방방곡곡 뉴스 김지영 대표
김지영(金智寧) 기자, 방방곡곡 대표
, 신라 경순왕과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가 결혼하여 탄생된 김선(金鐥) 조로부터 33세손인 언양(彦陽) 김가이다. 江華 출생(1959생 돼지띠 54세)/서사초등학교 졸업/강서중학교 졸업/강화고등학교 졸업(학생회장 역임)/단기해병(방위병)/단국대학교 법학과 졸업/사법고시(법률, 정치, 경제, 역사 등 사회과학)/임학독서실 창립/언론사 방방곡곡 창립/향송건설 설립/방방곡곡 출판사/방방곡곡 뉴스 • 인터넷신문 발행인/방방곡곡 갤러리 관장/사)한구석 밝히기 실천운동본부인천지부 이사/인천광역시택견연맹 부회장/대한체육회 대한택견연맹 이사/언양김씨 대종회 이사/신라26대왕추향대제 홍보위원장/BBGG 기자클럽 창립/사)한국잡지협회 정회원 언론사/한국언론진흥재단 협력 언론사/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홍보 언론사 선정/계양산 한마음 이웃사랑 새살문화제 주최/방방곡곡 지방자치단체 단위 본부 설립 중/연평도 평화음악회 주관(러시아 오케스트라 초청)/제18회 독도천하택견명인전 주관/전국 지방자치단체 취재 홍보/인천광역시 계양구 웰빙 • 문화 • 경제의 고향 만들기 추진

 

저술 제조자 책임의 법리(논문)/방방곡곡 언론지 13년간 발행/강화문화유산/인천의 건축물문화유산(인천시 발주)/인천의 성 ․ 진 ․ 보 ․ 돈 ․ 포대 ․ 봉수대(인천시 발주)/사설, ‘정의의 시대적 변화’ 등 다수/인터뷰,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 제타룡 회장 등 다수/1만여 편 기사 및 사설 작성, 30만 장 이상 사진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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