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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1/06/26  김보형
강화산성 이제는 고려시대 꼬리표를 떼자!
강화산성은 1710년에 축성된 강화유수부성(江華留守府城)을 가리킨다.

 

 

시대적 착오로 오염된 강화산성

강화에는 좀 유별난 집착이 하나 있다. 있는 조선시대 놔두고  없는 고려시대를 자꾸 내세우려 하는 것이 그것인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강화의 대표 유적 '강화산성'이다.

 

이 성은 지금으로부터 딱 300년 전 조선 숙종 때인 1710년에 쌓은 성인데 여기에다 자꾸 '고려'라는 포장지를 씌워 보려고 애쓰는 형국이어서 역사 왜곡을 지적하기에 앞서 안스러운 마음이 먼저 든다. 

 

조선시대 4대史書라는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일성록,비변사등록 등을 조금만 들여다 봐도 답이 명확히 나오는데 이걸 소홀히 하고 있다. 





◀서문(첨화루) 앞에 서있는 강화산성 안내판인데 문안을 읽어보면 틀림없는 고려시대 성이다.



지금 당장 '강화산성'을 인터넷 검색창에 집어 넣어 나오는 검색 결과를 한번 보시라. 
몽고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쌓은 고려시대 성으로 왜곡된 기사가 웹상에서 무한증식하고 있다. 

 

무너져 없어진지 752년이나 된 성이 유령처럼 21세기를 떠돌고 있다. 기존에 강화에서 발간한 각종 문헌자료,안내문 등이 그 왜곡의 시발점임은 물론이다. 39년 간의 짧은 도읍 시절이 아쉬워서일까?.. 남한지역 고려시대 유적의 희소성에 기대어 관광자원으로 부각시키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이 문제를 알면서도 시정할 열의나 용기가 없는 것일까.

 

그러나 정작 두려운 것은 혹시 관련자들이 뭐가 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구심이다. 

관련 학자들도 현지의 이런 분위기를 의식하는 듯 핵심은 건드리지 않고 우회하므로써 곡학아세를 의심 받고있다.  그러나 필자의 지적을 뒷받침하는 현시대의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2007년에 인천박물관에서 조사하고 펴낸 '강화산성 지표조사 보고서'에는 정확하게 강화산성은 조선시대의 성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이는 강화산성이 고려시대의 성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강화 사람들을 무척  당황하게 하고 실망하게 할 것이다.

 

필자도 역시 강화사람이고 강화산성 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라 애착이 많이 가는 유적이지만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 무슨 밀가루 반죽처럼 전략적인 考慮에 따라, 또는 특정 시대 사람들의 감정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져서는 아니 되겠기에 강화산성의 여러 잘못된 점들을 여기 제기하고 관계자들의 심도있는 연구와 시정을 촉구하고자 한다



강화읍 성곽 계보도는 진실을 찾아가는 지도


아래는 강화읍의 성곽 계보도이다. 강화읍 지역의 성의 역사가  좀 복잡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왠만해서는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데 이 복잡한 것을 체계도 잡지 않고 뒤죽박죽 섞어서 한 줄로 표현하거나 또는 한 문장에 우겨 넣다보니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성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강화읍 지역에 존재했던,그리고 존재하는 성의 계보라 할까 역사를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게 도표로 정리해 봤다. 현재 복원 중에 있는 강화산성이 언제 어떻게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지 도표를 보면서 그 뿌리를 찾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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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城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고려시대 江都에는 세 개의 城이 축성되었다. 몽고의 1차 침략이 있자 1232년 수도를 강화로 옮기고 3년 여에 걸쳐 궁궐과 관청 건물들을 지었는데 이 때 현 고려궁지와 관청리 일대를 둘러싸는 내성(內城)을 쌓았다. 궁궐과 관청들을 방어하기 위한 이른바 궁성(宮城)이다.

1237년에는 육지와 면한 동쪽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외성(外城)을 쌓았고  1250년에는
궁성(내성)과 함께 강도권역 전체를 커버하는 대규모 중성(中成)을 쌓았는데 이 성이 바로 도성(都城)이자 황성(皇城)이다. 

 

이 세 개의 성들은 숙명적인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모두 흙으로 쌓은 土城이고 1259년에 몽고의 강요로 동시에 파괴되어 한 순간에 사라진 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토성의 흙가루가 바람에 날려도 다 날아갔을 752년이라는 엄청난 시간만 흘러갔을 뿐이다. 


헷갈리는 존재, 조선 초기 강화도호부城

1259년에 강도 내성,중성,외성이 헐려 없어지고  1270년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 해버리자 江都는 완전히 폐허가 되고 강화현으로 강등된 치소(治所)마저 심주(沁州)로 가버리니 그야말로 잡초만 우거진 황성(荒城)옛터가 되어 무심한 세월의 더께만 쌓여가고 있었다.

 

그렇게 162년이 흐르고 왕조도 바뀌어 바야흐로 조선 세종 14년 (1432년)이 되자 도호부로 승격된 강화의 치소와 이를 방어할 도호부성을 어디에 쌓느냐를 가지고 조정에서 논란이 벌어졌다.  쉽게 결론이 안나자 골치가 아파진 세종대왕께서는 여러 고위 관료들을 강화에 보내 직접 현장을 살펴보고 와서 의견을 제시하도록 했다.

강화도호부성의 유치를 두고 배지평背只平(내가저수지 일대로 추정)과  옛 성터(현 고려궁지와 관청리 일대)가 치열하게 맞붙은 상황에서 현지답사를 하고 온 관료들의 의견도 역시 양쪽으로 갈렸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던 당대의 축성 전문가이자 병조판서인 최윤덕 장군이 古城터를 강력하게 미는 바람에 옛날 고려 내성이 있던 자리, 현 강화읍에  강화도호부성 축성이 결정되고 아울러 치소를 유치하게 된다. 

이 성은 고려 강도시대 내성 자리에다 쌓았지만 분명한 것은 고려시대의 유적을 복원하는 차원이 아니고 이전해 온 강화도호부를 방어할 목적으로 새롭게 돌로  쌓은 성인 것이다.

 

하지만 같은 자리에 같은 규모로 쌓았고, 외성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인데도 일부에서 內城이란 표현을 썼던 만큼 고려시대의 DNA를 조금은 간직했다고도 볼 수 있다. 

 

고려 내성과 조선후기에 축성된 강화유수부성(현 강화산성)의 중간 쯤에 존재했던 이 성은 현재 흔적도 없고 역사적 언급에서도 이 성의 존재는 아예 빼먹거나 아니면  강화유수부성(현 강화산성)이 고려시대의 성으로 행세하는데 근거 아닌 근거 역할을 하고 있다.




◀1684년(숙종10년)에 그린 江都全圖 중 현재 강화읍 부분이다. 조선 초, 세종 때 쌓은 강화도호부
성을 이 때까지 고쳐가며 유수부城으로 사용 중이었는데 亭子山(見子山)과 동락천, 花山(남산)이
포함되지 않은 작은 규모의 이 城에서 고려 강도시절의 내성의 모습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연도가 밝혀진 가장 오래된 강화지도에 그려진  이 城의 흔적은  지금 찾아보기 힘들다.





◀ 위의 지도에 나온 강화도호부성의 위치를 위성사진에다 옮겨 그려봤다.  당시 성의 남문은 현재
김상용선생 순의비가 있는 자리에  있었고 오른쪽으로 '성마루'라는 지명이 남아있는 성공회 성당
언덕길을 따라 북산 줄기로 이어졌고 남문 왼쪽은 열무당과 진무영 중영이 있던 현 강화읍사무소
뒷쪽으로 성줄기가 이어지다가 성광교회 언덕으로 돌아 올라가 역시 북산 줄기로 연결되는
모습이었다.  만약 고려 내성을 복원한다면 이 코스가 될텐데 주거 밀집지역이라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강화유수부성의 탄생

모든 성이 그렇듯이 한번 잘 만들어 놓은 성곽은 오랜 세월동안 시대를 초월하여 사용되는게 보통이다.  

강화도호부성도 조선 初에 축성되어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겪으면서 18세기 초까지 존속하게 된다. 준공 후 280여 년을 사용해 오면서 수없이 많은 修築작업을 거쳤으리라 짐작되는데 성의 규모가 작고 낡아 한계에 봉착하니 북벌을 계획하던 효종조부터 새로운 성의 필요성이 거론되기 시작한다. 

불과 60여 년 전 병자호란의 참화를 당해 본 이후라 더 견고한 보장지처를 만들고 싶어했던 숙종임금은  비국당상(備局堂上)들에게 강화유수부성 축성 프로젝트의 진행을 명한다. 

당시 숙종임금의 강화유수부성의 축성 의지가 얼마나 확고했는지를 보여주는 비변사등록 한 구절을 보자. 

숙종 34년(1708년) 12월6일조에 보면 "上曰, 昔者, 趙簡子之必欲以晉陽依歸者, 有可恃之勢而然耳, 卽今都城, 周廻闊大, 雖動八路之民, 非一二月之間, 所可修築, 南漢則地勢孤絶, 亦非久守之地, 江都雖有天塹, 內無城築, 尙未完備, 故欲築內城於江都, 必爲他日依歸之地, 可以周旋物力, 速爲完築, 不可曠日而持久也。"


임금이 이르기를 "옛날 조간자(趙簡子 : 전국시대戰國時代 진晉의 대부大夫 )가 기어코 진양(晉陽)으로 의지할 곳을 삼으려 한 것은 믿을 만한 형세가 있었기에 그러한 것이다.

 

지금 도성(都城,서울)은 둘레가 넓고 커서 비록 8도의 백성을 다 동원한다 하더라도 한, 두 달 사이에 수축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되고, 남한산성은 지형이 외따로 떨어져 있어 오래 지킬 수 있는 곳이 못되며, 강도는 비록 천참(天塹,돈대)이 있다 하나 내성(內城)을 아직까지 완비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도에 내성을 쌓고 반드시 후일에 의지할 수 있는 곳으로 삼으려 한 것이니 물력을 주선하여 속히 완축할 일이지 시일을 끌어 오래 걸리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 하였다.

 

하지만 임금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축성의 범위에 남산을 포함시키느냐  마느냐를 놓고 기획단계에서부터 많은 논란이 벌어져 숙종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 등재된 내용을 중심으로 당시 비국당상(備局堂上)들과의 논의 내용과 최종 의사결정 과정을 요약해 살펴보자. 비변사(備邊司)는 요즘으로 말하자면 '안보장관회의(비상국무회의) + 합동참모본부' 쯤 되고 이의 멤버인 비국당상은 안보관련 국무위원들이 되겠다. 

■ 1708년 숙종34년 12월7일
이 날도 영의정 최석정, 신임 강화유수 박권, 이조판서 조상우, 行예조판서 이인엽, 공조참판 민진원 등이 새로 쌓는 성에 남산을 포함 할 지 말 지를 두고 설왕설래했지만 양쪽 의견을 경청한 숙종이 "반드시 남산을 넣어서 쌓을 것"으로 교통정리한다.

■ 1709년 숙종35년 축성시작
일 년전 숙종이 남산을 넣어서 쌓을 것을 결정했으나 강화유수 박권은 영의정 최석정의 현지 지휘아래 3城, 즉 품(品)자형 성을 쌓기 시작한다. 이 설계변경이 어떤 과정으로 진행됐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영의정이 숙종의 재가를 받았으리라 본다.     

 

◀ 品자 城은 공사규모를 축소하여 예산을 줄여보자는 데 촛점을 맞춘 아이디어였다. 기존의 부성은 보수해서 그대로 쓰고  남산에 작은 산성을 하나 쌓아 감제고지를 선점하고, 견자산에는 돈대를 설치해서 기각지세(掎角之勢)
를 이루게 하면 방어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결과적으로 폐기된 案이지만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 안을 선호한다.  성이 작아 지키기 쉽고 세 성이 유기적으로 호응하면 강력한 방어력을 보여줄 수 있겠다. 다만 군사들의 훈련이  잘 되어 있지 않으면 쉽게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다. 

■ 1710년 숙종36년 7월2일
4월29일 박권의 후임으로 강화유수가 된 민진원이 입시하여 강화성의 남산 포함 여부 건을 다시 제기하여 장시간 논의를 이어간다.

민진원 유수는 남산을 포함하는 큰 성을 원했으나 영의정 이여, 우의정 김창집, 형조판서 유득일, 공조판서 김석연, 병조참판 박권(직전 강화유수), 行사직 이언강 등 참가한 비국당상 대부분이 품자형 성(3성)을 지지하고 숙종마저 품자형 성을 지지하니 유수 민진원은 전임 박권이 진행하던 품자형 성의 공사를 그대로 이어간다. 

■ 1710년 숙종36년 8월17일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오빠인 강화유수 민진원은 의지의 조선인이었다. 한 달 반 전인 7월2일의 결정에도 굴하지 않고 또다시 남산을 포함하는 府城 축성계획을 들고 숙종 앞에 나타서는 품자형 성(3성)의 문제점을 하나 하나 아뢰고 남산을 포함하는 1성을 강력히 주장한다.

지난 7월2일에  남산포함 1성에 반대했던 대부분의 비국당상들이 이 번에는 품자 성 반대, 남산포함 1성에 찬성으로 돌아서며  민진원의 편에 섰다. 한 달 반동안 민진원은 이들을 열심히 설득했던 것이다. 그리고 강화 민심도 모두 통틀어서 한 성으로 만들기를 원한다는 연명(聯名) 호소문까지 첨부하니 숙종 임금이 이르기를

" 처음에는 남산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하였다.그러나 물력(物力)이 부족함으로 인하여 또 3성 쌓기로 결정하여 기각지세로 만들려 하였다. 지금 유수의 아룀을 들은 즉 계획이 타당하니 생각이 장원(長遠)하다고 할 수 있다. 3성은 쌓지 말고 아뢴 바에 의해서 통틀어서 한 성으로 만드는 것이 옳을 듯 하다." 하였다. 

■ 1710년 숙종36년 12월3일
남산포함 1성으로 최종 결정된 축성공사가 정확히 몇날 몇일에 완공되었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이 날 강화유수 민진원이 파수군졸 배치 건으로 임금의 결재를 받으러 온 자리에서 "내성을 쌓았으니 마땅히 파수군졸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한 언급으로 봐서 강화유수부성은 이미 1710년 12월3일 이전에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8월17일에 남산포함 1성이 최종 결정되었으니 4개월 만에 공사를 끝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정의 열악한 재정상태 때문에 감히 꿈도 못꾸던 대역사였지만 조선 8도의 물력을 최대한 동원하여 빠른 시일 내에 축성을 마칠 수 있었던 데는 무엇보다  숙종의 의지가 강했고 공사를 지휘 감독한 숙종의 처남, 강화유수 민진원의 추진력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강화유수부성이 완공된(1710년) 직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강화지도의 성곽 부분이다.
주황색으로 표시한 윤곽이 막 완공된 강화유수부성이고 그 안에 보라색으로 표시한 J자 모양의
선이 세종 때의 도호부성인데 동쪽과 남쪽 성벽만 남아있는 모습이다. 서북쪽 흔적만 남은
자리는 토성 구간이거나 이미 허물어진 곳으로 추정된다. 
구성(舊城)과 신성(新城)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유일한 강화지도이며 신성 즉 강화유수부성(강화산성)이
고려시대의 성이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역사자료이다.




훗날 강화산성이 된 강화유수부성의 의미와 결론


이 성의 공식 명칭은 '江華留守府城'이지만 실상은 임금의 성, 즉 王城이라고 봐야한다.  변란시 왕의 최후의 피난처인 강화행궁을 방어하는 것을 최우선 목적으로 만들어진 성이기 때문이다. 

 

강화유수부성은 강화라는 일개  지역의 축성공사가 아닌, 바로 王事였기 때문에 아주 열악한 재정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각 부서와 지역을 초월한 전폭적인 지원으로 단기간 내에 완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변사등록에 기록된 일련의 축성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숙종의 의지가 강력히 반영된 왕성인 강화유수부성은 18세기 조선후기의 왕권사상과 축성술이 결합된 성곽으로 고려 강도시대의 城과는 전혀 무관함을 알 수 있다. 현재 '강화산성'에 잘못 붙어있는 '고려시대의 성'이라는 꼬리표를  이제는 떼어내 강화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 남산-견자산-북산으로 이어지는 강화유수부성의 동쪽, 남쪽 성줄기가 뚜렸하다.(1876년,고종13년에 촬영)

 

 

'강화산성'이 정말 山城인가? 

개요

강화산성 시리즈1편에서는 강화산성의 잘못된 족보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이번에는 이 성의 이름 문제를 거론하고자 한다. 언급했듯이 강화산성은 1710년에 축성된 강화유수부성(江華留守府城)을 가리킨다.

 

이 정식 명칭을 나두고 왜 강화산성이라고 부를까?  조선시대 4대사서에도 나오지 않는, 근거 불명확한 강화산성이라는 이름이 도대체 언제부터 사용되어 온 것일까?  

강화산성이 山城일 수 없는 이유를 말하기 위해 우선 산성의 개념부터 살펴 보기로 한다.


우리나라의 산성은?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라고 할 만큼 고대로 부터 많은 산성을 축조하여 국토를 방어해 왔다. 산성은 험준한 산지의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성곽으로 산봉우리를 둘러싸는 테뫼식과 계곡을 포함시켜 쌓는 포곡식(包谷式)이 있다.


일단 전쟁이 나서 적군이 몰려오면 인근의 모든 民.官.軍이 무기와 식량 등을 싸들고 거주지를 떠나서 산성으로 들어가 숨거나 농성(籠城)하면서 항전하게 되는데 이와같은 入保전술은 淸野전술과 함께 적은 병력과 자원으로 넓은 땅을 방어하는데 아주 효과적이었기에 산성은 고래로 우리나라 방어전술의 핵심이었다.

서애 유성룡의 산성론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옛적에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고 할 때,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모두 "고구려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쌓았기 때문에 쉽사리 함락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하며 글안이 고려를 치려 할 때도 신하들이 간하기를 "고려 사람은 산성에 새처럼 깃듭니다.

 

대군이 가서 공격하다가 성공을 거두지 못할 뿐 아니라 자칫하면 제대로 돌아오지도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한다. 이것을 봐도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국토를 방어하는데 산성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하였고 적들이 이 산성을 두려워 하였다.


    



만주에 고구려의 오녀산성, 한강변의 아차산성, 한양도성의 입보처(入保處)인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권율장군이 대첩을 이룬 행주산성, 청주의 상당산성, 단양의 온달산성 등이 있고 김포에는 문수산성이, 강화 온수리에는 정족산성이 있다.

 

조선시대만 해도 전국에 759개소의 성곽이 있었는데 이 중에 182곳이 山城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산성은 산에다 쌓는 성인 것이다. 오녀산성은 오녀산에, 아차산성은 아차산에, 북한산성은 북한산에, 문수산성은 문수산에, 정족산성은 정족산에 있다. 그러면 강화산성은 강화山에 있을까?


그럼 강화산성은?

성자락의 일부가 북산이나 남산, 견자산을 지나가기 때문에 산성(山城)이라고 했을까? 물론 산성은 입지,형태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입보처(入保處)'라는 기능이 강조되는 것이 우리나라 산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어쨌든 산성이 되기 위한 제1의 요건은 산에다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산과 들을 지나는 강화산성을 굳이 형태적으로 분류한다면 평산성(平山城)이 되겠고 한양도성이 이런 범주에 들 것이다. 강화산성은 형태나 기능상으로 산성이 될수 없는 성이다. 

 

명칭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할 지 모르지만 역사복원에 있어서, 명칭이나 용어부터 정확한 복원이 이루워져야 그 복원되는 실체의 성격과 의미가 명확히 규정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자주 쓰는 성곽의 종류와 기능, 사례를 한번 살펴보자.

● 도성(都城) :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 江都中城, 평양성, 신라 금성, 조선 한양성. 
● 궁성(宮城) : 
궁궐과 관청 건물들을 둘러싼 성. 江都內城 ,평양 안학궁성,  경주 반월성.
● 장성(長城) :
국경,변방의 외적을 막기 위해서 쌓은 성. 江都外城,고려시대 천리장성
● 읍성(邑城) : 읍치(邑治)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 동래읍성,해미읍성,고창읍성,낙안읍성
● 나성(羅城) : 도성(都城)에서 궁성의 둘레에 있는 일반주거지를 크게 쌓은 성. 개성나성.


강화산성의 정식명칭
 

자 그렇다면 산성은 분명히 아닌 사적 제132호 강화산성은 위에 열거한 성곽 종류 중에 어디에 해당할까? 읍치(邑治)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 읍성(邑城)이라면 부치(府治)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은 부성(府城)이 될 것이다.  

 

강화의 경우는 조선8도에 네군데 밖에 없는, 읍(邑)보다 격이 한참 높은 유수부(留守府)였기 때문에 유수부성(留守府城)이 되는 것이다. 강화산성이 아니라 강화유수부성(江華留守府城)이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강화유수부를 강화府로, 강화유수부성을 강화府城으로 줄여서 지칭한 관행과  조선시대 강화지도에 府城으로 표기한 전례에 따라 강화부성(江華府城)을 정식 명칭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향후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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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명 신청 : 애초에 사적 제132호로 지정될 당시(1964년) 실무자의 신고서 작성에서부터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 근거에 의해 50년 가까이 잘못된 山城 이름표를 당연한 듯 달고 있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관련 기관에서는 문화재청과 협의하여 하루빨리 개명작업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관광 콘텐츠 개발 및 홍보 : 강화부성을 강화산성이라는 애매모호한 이름으로 바꾼 데에는 고려시대의 城으로 견강부회하기 위한  1964년 당시 관계자들의 원모심려(遠謀深慮) 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드는데 사실이라면 부질없는 遠謨요 악수가 된 深慮일 뿐이다. 

 

우리나라에  흔해 빠진 山城이나 邑城보다 희소가치가 있고 왕권과 관련이 깊은 강화府城이 관광 콘텐츠 개발이라는 측면에서도 훨씬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엉터리 스토리를 담고있는 안내판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역사왜곡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일회성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한번 거짓으로 꾸며지기 시작한 역사 서술은, 그 거짓의 속성 때문에 끊임없는 허구의 반복으로 점철되게 마련이다.

 

山城이란 이름표를 달고 고려시대의 성으로 왜곡된 채  50년여 년을 보낸 강화산성, 두 세대가 넘어가기 전에 빨리 조선시대의 강화부성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유적의 얼굴 안내판

어떤 유적이든지 그 유적 앞에 서있는 안내판만큼 그 유적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 자료는 없다고 본다. 또 그래야 되고 사람들은 또 그렇게 믿고 있다. 탐방객이 유적 현지를 직접 찾아가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문헌자료나 인터넷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현지에서만 접할 수 있는 정확하고 깊이있는 정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안내판의 중요성이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탐방을 마치고 돌아간 그들에 의해서 전파되는 유적의 안내문은 잘 발달된 각종 매체를 통해 사통팔달 퍼져나갈 뿐 아니라 정보 재생산의 원본이 되고 근거자료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적 안내문은 역사적 근거에 의한 충실한 내용과 함께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쉽게 전달되고 이해될수 있는 스토리 구성과 정확한 표현에 신경을 써야한다. 

본고 강화산성 시리즈 下편에서는 강화부성(강화산성) 안내문의 잘못된 부분을 적시하고 이의 영향을 받았을 몇몇 관련 인터넷 사이트의 설명 문안도 살펴 본 다음 새로운 안내문 시안을  제시코자 한다.


 

강화산성, 이제는 오류 범벅 안내판을 떼자! (下)

강화부성(강화산성) 안내판 무엇이 잘못됐나?




강화산성, 즉 강화부성을 설명하는 안내판에 고려시대 얘기가 나오는 것 자체가 잘못인데 그 고려시대 얘기 조차도 잘못되어 있어서 조목조목 살펴본다.




궁궐을 지을 때 함께 쌓은 성은 도성이 아니고 강도내성, 즉 궁성(宮城)이다. 도성(都城)은 강도중성(江都中城)을 말하는 것인데 1250년에 쌓았고 애석하게도 9년만에 헐리게 된 비운의 성이다. 





강도의 내성,중성,외성은 1232년부터 1250년 사이에 쌓았으니 13년이 아니라 18년간에 걸쳐 만들었다고 해야 맞는다. 세 성이 만들어진 시기는 각각 다르나 파괴되어 사라진 때는 1259년으로 같다.




앞 선 강화산성 시리즈 上편에 자세히 언급했듯이 강도내성은 1259년에 파괴되어 없어졌고, 현재의 강화산성은 1710년에 숙종이 강화유수 박권과 민진원을 시켜 신축한 성이다.그러므로 고려내성을 현 강화산성과 연결짓는 것은 억지일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고려내성에 해당하는 것이 현재의 강화산성이다."라는 안내문의 표현은 근거없는, 완전히 왜곡된 서술이다.





숙종 3년 (1677년)에 유수 허질(許秩)이 성을 수리(修築)했다는 사실을  인용한 문구로 보인다. 이것은 조선 전기 부성(朝鮮 前期 府城)을 말하는 것으로 세종 때 돌로 쌓은 성이 오래되고 낡아 숙종 때 보수공사를 했다는 것이다. 1710년에 신축된 조선 후기 부성인 강화산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부분이다. 고려내성과 조선 전기 부성, 그리고 조선 후기 부성(강화산성), 이 세 개의 성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주요 인터넷 사이트도 심각한 오류


● 강화군청 홈페이지에 나와있는 강화산성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자.
 


현지 안내판에는 고려내성과 연결하여 견강부회하더니 여기는 고려中城을  강화산성과 연결시켜 놓았다. 몽고군의 강요로 헐렸다는 얘기를 하면서 바로 조선 초에 석성으로 개축했다고 나온다. 헐려 없어진 성이 어떻게 개축(改築)이 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이어지는 문장도 조선 전기 府城과 조선 후기 부성을 구분하지 못하고 한 데 섞어서 설명하고 있다.

유수 박권과 유수 민진원이 성을 나누워서 완성시킨 것처럼 썼는데 정확히 서술이 아니다. 전임 유수 박권이 1709년에 착공하고 진행한 공사가 품(品)자형 3성이었는데 1710년 4월에 부임한 후임 유수 민진원이 설계변경을 관철하여 1성으로 다시 공사하는 바람에 박권 유수가 진행했던 공사는 전부 헛공사가 되어버렸으니 박권 유수는 강화부성을 착공했다라는 기록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강화산성 시리즈 上편 참조)

성의 완성 시점도 1711년이라고 했으나 비변사등록의 기록을 보면 1710년에 성은 이미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1711년 4~5월에 숙종 임금께서 두 유수에게 축성의 공로를 치하하고 상으로 직접 숙마(熟馬)를 하사한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를 완공 시점으로 봤을 수도...

현지 안내판에서는 2개라던 성문장청이 여기에는 4개로 되어있다. 조선시대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정체불명의 성문장청(城門將廳)이라는 기구의 출처가 어디일까? 궁궐 문을 지키던 수문장청(守門將廳)이란 기구는 경국대전, 속대전, 대전회통 등에 나오는 조선의 정식 관청인데 이를 흉내 낸 듯한 성문장청은 강화성에만 있었을까? 이 네글자가 들어가 있는 문헌이 있는지 알고싶다.



● 강화나들길 사이트에 나오는 강화산성 설명문안


강화산성이 고려도성이라고 한 오류는 여기도 마찬가지이고 알 수 없는 말들로 짜깁기를 해놓았다.
-'궁궐을 건립할 때 도성 일부를 축조했고...' 
-'1234년 1월부터 궁의 내성으로의 규모로 축성했다.'
-'내성은 주위 약 1200m(주위 3,478척)로 지금의 강화성이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문안 작성자에게 설명 좀 듣고싶다. 



● 대한민국 문화재청 사이트도 한번 볼까요?



역시 여기도 강화산성은 고려시대 성이라고 간단하게 나와있다. 희귀하게도 성의 면적이 나와있다. 784,170제곱미터, 이 수치 가지고  성의 크기를 짐작하기는 쉽지않다.



● 네이버 백과사전


백과사전치고는 너무도 간단한 내용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산성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여기도 城의 면적이 나오는데 문화재청 사이트에 등재된 면적이랑 너무나 차이가 난다. 성의 규모(크기)를 나타낼 때는 보통 둘레로 표시한다.



● 남장대 안내판



최근에 복원된 남장대의 안내판 모습이다. 사진까지 곁들여 산뜻하게 만들었는데 내용은 그렇치 못하다. 오류가 반복되고 있는데 그 오류마저도 제각각 다르다. 1710년에 신축한 성을 여기선 개축이라고 해놨다. 개축(改築)이란 다시 고쳐 쌓는 것을 말하는데 신축한 성을 왜 고쳐 쌓았다고 하는지... 하여튼 왜곡의 몸통 "강화산성은 고려시대 성이다."를 바로 잡지 않는 한 이런 어거지 서술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필자가 제안하는 강화부성(강화산성) 안내문 시안(試案)




강화유수부성(江華留守府城)
- 사적 제132호


한동안 강화산성으로 불렸던 강화유수부성은 조선 숙종36년인 1710년 강화유수 민진원(閔鎭遠)에 의해 완공된 성으로 조선 4대유수부 중의 한 곳인 강화유수부를 방어할 목적으로 쌓은 석성이며 통상적으로 강화부성(江華府城)이라 부른다.

이전까지는 조선 초, 세종 때 쌓은 부성을 사용해 왔는데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겪으며 훼손된 것을 여러차례 수리하여 사용해 왔다. 고려 강도시대 궁성 터에다 쌓았기 때문에 당시 궁성(내성)의 모습과 규모를 어렴풋이 짐작케 해주는 이 조선 초기 부성은 280여 년이나 사용하여 너무 낡고 협소했다. 그러다 보니 더 크고 견고한 새 성을 쌓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 임금 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워낙 물력이 많이 들어가는 대공사여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미루워 오다가  숙종 임금 대에 와서야 드디어 새로운 강화유수부성을 축성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도 예산부족과 설계변경 등의 문제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원래는 기존의 성(조선 초기 부성)을 수리하여 재활용하고 남산과 견자산에 작은 성을 쌓아서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도록 하는 품(品)자형 3성으로 결정되어 축성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는데 도중에 다시 남산,견자산을 포함하는 1성으로 변경되어 결국 둘레 7.1Km에 달하는 성으로 완성되었다.
 
후기 강화부성은 유수부(留守府)의 성이라는 것도 특별하지만 이 명칭 뒤에 숨어있는 더 큰 의미는 조선왕조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즉, 보장지처(保障之處)였다는 데에 있다. 전란시에 위급한 상황이 되면 왕은 강화행궁으로 피신을 하게 되는데 이 행궁과 유수부를 지키는 1차방어선이 섬 둘레를 따라 49군데(당시)에 설치한 돈대(墩臺)이고  최후의 2차 방어선이 바로 이 강화부성인 것이다. 숙종 임금이 강한 축성의지를 보이고 내내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존 부성(조선 전기 부성)은 둘레 2Km 정도의 작은 성이었는데, 새 부성이 완성되자 점차 퇴락하여 취락지역으로 변했고 새로 쌓은 부성은 둘레 7.1Km에  강화 읍내를 전부 포함하는 평산성(平山城) 형태의 성이다. 동문(망한루), 서문(첨화루), 남문(안파루), 북문(진송루) 등 4개의 문과 네군데의 암문을 가지고 있으며 동락천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석수문인 상수문과 하수문이 있다. 전시 성곽전투 지휘소인 남장대,북장대,서장대가 있었는데 이 중 남장대(南將臺)가 2010년에 복원됐다.

1866년(고종3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 육전대와 처음으로  실전을 치루웠으나 유수 이인기가 도망치는 바람에 동문으로 공격해 온 프랑스군에게 점령 당하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고 1876년 운양호 사건 이후 진행된 조일회담 때는 일본 대표단과 일본군대가 남문으로 입성하기도 했던 아쉬운 근대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방방곡곡 김보형 기자http://bbg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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