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l  로그인  l  회원가입  l  아이디/비밀번호찾기  l  2020.2.27 (목)
 http://www.bbggnews.com/news/8935
발행일: 2012/09/20  김보형
118년 전, 강화유수부 동헌에서는...

118년 전의 강화유수부 동헌

 

이 사진은 강화읍 고려궁지 안에 있는 조선시대 강화유수부 동헌의 118년 전 모습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격인 수사해방학당(水師海防學堂)에 교관으로 초빙된 영국의 예비역 해군대위 콜웰(Callwell)이 1894년 6월에 촬영한 사진으로, 월간지 모닝캄(The Morning Calm) 1899년 2월호에 게재했던 귀중한 사진자료이다. 갑고지 바닷가에 세웠던 수사해방학당(水師海防學堂)은 총제영학당(總制營學堂)으로도 불렸는데 이 사진을 찍은 직후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학당은 몇 달 뒤에 폐교됐다.

 

 

 

모닝캄誌는 1890년 7월에 창간하여 1939년 10월에 폐간한 영문잡지로 영국 성공회 조선 선교본부가 본국에 매월 한 차례씩 보내는 선교보고서 역할을 하던 잡지였다. 종교誌였지만 19세기말 20세기초 우리의 존재를 외부에 알리는 홍보매체 역할도 해줬는데 Morning Calm이라는 제호는 현재 대한항공의 기내보가 되어 역시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데 쓰이고 있다.

 

당시 흑백사진에 찍힌 동헌과 지금의 동헌 모습을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여덟칸 대청을 여닫는 4분합문과 오른쪽 끝에 있는 마루방, 2단으로 된 장대석 기단(基壇) 등은 변함이 없는 반면, 다른 건물이 아닐까 할 정도로 다른 점도 눈에 띄는데 우선 앞에 행사용 임시 차양막을 설치한 게 보이고 현판도 명위헌(明威軒)이 아닌 제승당(制勝堂)이고 왼쪽에는 이관당(以寬堂)인 듯한 현판이 하나 더 달려있다.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이관복민(以寬服民) 즉 "관대한 태도로 백성들을 따르게 한다"라는 수령의 덕목이 당호에 스며있음을 알 수 있다. 돌층계도 건물 쓰임새가 많던 시절에는 세개나 있었으며 모양도 조금 다르다. 동헌 앞 뜰도 당시보다 많이 낮아졌으니 118년 사이에 많은 보수공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승당 현판 아래 강화유수부의 관리들이 도열해 있는 사진의 상황은 시기적으로나 정황상 1894년 6월22일 강화유수로 발령받은 김윤식의 취임식 행사 모습으로 추정한다.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절 고위 관료,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김윤식(金允植 1835년~1922년)은 갑오개혁을 주도하고 김홍집 내각의 외부대신이 되어 개혁 정치에 힘썼다.

 

하지만 1910년 한일합병시 不可不可라는 교언(巧言)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만큼 역사적 평가는 부정적인데 그나마 이완용이라는 대역적이 그의 앞에서 화살을 다 맞아주는 바람에 그의 친일매국 행각은 많이 가려진 측면이 있다. 아무튼 그는 오랜 유배생활에서 풀려날 때도 이완용의 덕을 봤고 관운도 굉장히 좋은 사람이다. 한 번 하기도 힘든 강화유수를 김윤식은 두 번이나 했다. 자고로 강화유수라는 자리가 중앙정계의 실력자이거나 실력자가 되거나 했던 요직이었음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경기,황해,충청 3도의 수군을 관할하던 해연총제영(海沿總制營)을 혁파하고 그 지휘권을 강화 진무영에 이속시키라는 명을 받았던 김윤식 강화유수 겸 진무사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동헌의 현판을 제승당(制勝堂)으로 바꿔 단 듯 하다. 삼도수군통제영을 한산도에 설치한 이순신 장군이 수군 지휘관들과 작전회의를 하던 장소도 제승당이니 장군의 기를 이어받아 상승 무적의 해군을 육성하고자 하는 바램을 표출한 것이리라.

 

제승(制勝)이란 표현은 손자병법의 허실편에 나온다. 승리할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을 파악하고 관찰하여 최적의 조건들을 결합시키는 형세, 형상을 제승지형(制勝之形) 이라고 했다. 강화에는 '제승'이 하나 더 있는데 숙종 5년(1679년)에 설치한 48돈대 중 강화읍 용정리 해안가에 자리잡은 제승돈대(制勝墩臺)가 그것이다. 이 돈대 앞에는 제승亭도 있었다고 하나 무너진지 오래다.

 

 

이 사진에서 또 한가지 유의해서 봐야할 것이 있는데 바로 앞뜰에 설치한 측우기(測雨器)와 측우대(測雨臺)이다. 사진은 흐릿하지만 황동으로 만든 측우기와 화강암으로 만든 측우대가 분명하게 보인다. 현재 이 측우기는 망실되어 소재불명이고, 비슷한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충청감영(공주)의 깊이 31cm짜리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는 1837년에 제작되었는데 현재 보물 제561호로 지정되어 기상청에서 보관하고 있다.

 

강화유수부에서는 1770년 측우제도가 재건되면서부터 우량관측이 시작되었으며, 1830-1892년간 79회의 측우기 수심 즉 우량 보고가 강화부 장계등록(江華府 狀啓謄錄)에서 확인되고 있다. 국가경제의 근본을 농업에 의존하던 시대였기에 우량 측정과 보고, 우량 기록의 관리 등이 지방 수령들의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였음을 간파할 수 있다.

 

이 사진 한 장 속에 내포된 역사적 의미가 이렇듯 만만치가 않은데 강화관련 근대사료에서 언급된 적이... 아니 이 사진이 강화유수부 동헌이라고 적시한 자료 자체가 없었던 걸로 보이며 민망스럽게도 기상학계에서 먼저 심영(沁營)의 '측우기 사진'으로만 유통되고 있었다. 고려궁지 안에만 가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강화유수부 동헌, 볼 때마다 왠지 건조한 느낌이 들었지만 118년 전의 이 사진을 보고나니 선조들의 따스한 숨결이 느껴진다.

 

방방곡곡 김보형 기자(강화군 향토사학자) http://www.bbggnews.com


포토뉴스영상뉴스
평화의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