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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08/24  김보형
잃어버린 돈대(墩臺)를 찾아서

정체불명의 오래된 돈대(墩臺) 사진

 

 

위 사진은 몇 년 전부터 인터넷에 출처 불명으로 떠돌던 사진인데 처음 보는 순간, 강화도에 산재해 있는 여러 돈대 중 한 곳의 오래 전 사진이구나, 라는 느낌을 직감적으로 받았다. 그러나 강화출신인 필자도 어느 돈대라고 꼭 집어 얘기할 수 없을 정도로 낯 선 곳이었다.

 

인터넷의 한 밀리터리 사이트(http://panzercho.egloos.com/2765527)에서는 "신미양요 당시 미군에 점령당한 강화도 초지진의 포대지의 모습으로 포대 성곽의 높이는 대략 3미터 정도 됩니다."라는 설명을 당당하게 붙여 놓았다.

 

그러나 이곳은 초지돈도 아니고 초지진 남쪽에 있던 진남포대도 아니라는 것은 우리 강화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한마디로 저곳은 초지진 일대의 지형이 전혀 아니다. 많이 허물어졌지만 저 모습은 포대지가 아닌 전형적인 사각형 돈대의 모습인데 강화 어느 지역의 무슨 돈대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저 일대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강화사랑닷컴 게시판에 사진을 올려놓고 공개 질문도 해봤지만 아직까지 답글이 없었다.

 

강화의 52개 돈대 중에는 많이 알려져서 사람들이 자주 찾는 유명 돈대가 몇 군데 있다. 월곶돈, 갑곶돈,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 덕진돈, 초지돈, 분오리돈, 장곶돈 정도를 들 수 있겠는데 이곳에 관광객들이 집중적으로 방문한다. 나머지 돈대는 사람들이 거의 안찾거나, 잘 모르거나, 복원이 안됐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곳들이다. 제한된 화면이라 강화사람들도 잘 알아채지 못하는 위 사진의 돈대는 당연히 유명 돈대는 아닐 것이니 사람의 발길이 뜸한 외진 곳의 돈대가 분명하다. 유명하지 않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은건 아니지만 더이상 알아볼 정보가 없어 이 돈대의 신상털기를 몇 년째 중단하고 있었다.

 

염주돈(炎珠墩)의 발견

염주돈(炎珠墩) 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강화도의 돈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나 갑구지 쪽에 살던 사람이 아니고서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갑구지에 가면 강화대교 옆에 인삼센타가 있고 그 뒤에는 해발 74m의 '당산(堂山)' 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만수산(萬壽山)이 김포의 문수산을 마주하며 굽이치는 바닷물을 내려다 보고있다. 바로 이 산 동쪽 해안가 언덕위에서 강화해협 갑구지 앞바다를 지켰던 돈대가 이 염주돈이다.

 

구글이 제공하는 서비스 중에 '구글 어스"라고 있다. 위성 이미지, 지도, 지형 및 3D 건물 정보 등 전 세계의 지역 정보를 인터넷으로 보여주는 위성 영상 지도 서비스이다.  컴퓨터 모니터로 전세계 어느 곳이든 다 들여다 볼 수 있으니, 필자도 가끔씩 구글어스를 통해 미지의 땅을 위성의 시각으로 내려다 보며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곤 한다. 그러다 우연찮게 위 사진의 돈대가 있는 장소를 찾게된 것이다.

 

 

이 일대를 좀 더 넓게 잡아 본 구글어스 사진이다. 오른쪽에 갑곶돈이 있고 왼쪽 용정리 쪽으로 제승돈이 있다. 염주돈이 있는 당산(만수산)에는 딱 한번 가 본 기억이 있다. 고1 땐가 고2 때 해병대 상륙훈련을 참관하러 단체로 갔을 때 저 산 중턱 어디엔가 앉아서 상륙돌격장갑차가 강화해협의 물살을 가르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본 적이 있다.

 

 

이 사진은 강화해협 건너 김포 성동나루에 있는 선착장 석축로( 경기도 기념물 제 108호)의 최근 모습이다. 선착장 석축로를 찍은 사진이지만 건너편 갑구지의 만수산이 아주 잘 나와 있다. 노란색 화살표가 바로 염주돈이 있는 자리인데 갑구지 앞바다를 일거에 제압할 수 있는 요충지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가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도를 초토화했던 병자호란(1636년)때나 프랑스군이 상륙하여 강화부성을 유린했던 병인양요(1866년)때도 그렇고 일본군이 상륙하여 일방적인 수호조약을 강요하게 되는 운양호사건(1875년) 때도 이 염주돈은 그저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으니 무너진 돈대만큼이나 필자의 억장도 같이 무너져 내림을 느낌이다. 병자호란 때는 아직 돈대가 설치되기 전이긴 하지만 그 치욕의 역사를 모두 지켜봤을 만수산과 염주돈은 오늘도 갑구지 앞바다를 굽어보며 말없이 그 날들을 증언하고 있다.

 

염주돈이 나오는 또다른 사진

 

 

이 사진은 강화 외성의 정문인 진해루(鎭海樓)의 모습으로 잘 알려진 사진이죠. 강화군에서 발간한 '江華 옛地圖' 206, 207쪽에도 수록되어있다. 구 강화대교와 신 강화대교의 중간 지점쯤 되는 저 진해루 안 쪽에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로 볼 수 있는 조선수사해방학당(총제영학당)이 1893년에 세워졌었다. 이곳은 현재 문화재보호 4구역에 속해 있지만 토지를 매입한 천주교 인천교구가 문화재 형상변경 허가를 받아 성당과 영성수련관을 짓고 순교성지를 조성하고 있는 곳으로, 이로 인해 강화외성과 진해루, 갑곶돈과 제물진, 총제영학당,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등의 역사유적 복원은 이제 완전히 물건너 갔다고 봐야 될 지경에 이르렀다.

 

 

연출된 듯한 이 사진은 살펴 볼 꺼리가 의외로 많다. 무너지기 전의 진해루의 모습과 한가로운 어촌 풍경, 나룻배와 노 젓는 떠꺼머리 총각 뱃사공, 만수산(당산) 꼭대기의 나무 한그루와 그 밑에 있는 당집도 어렴풋이 보이구 해안가를 따라 이 산 동쪽 기슭으로 이어지는 외성의 모습도 또렷이 볼 수가 있다. 여기에 희미하게나마 중요한 사실을 하나 더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이 외성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능선 위에 약간 두꺼워 보이는 성벽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바로 염주돈의 측벽 모습이다.

 

1679년 병조판서 김석주가 작성한 돈대 설치계획서의 염주돈 항목을 보면 "頂舊有治築 狀如周墻 今宜設直燉 北距制勝亭 南距甲串津 雜石在其傍 "(산꼭대기에 예전에는 담장을 두른 듯한 성을 쌓았지만 이제는 직사각형의 돈대를 설치해야 한다. 북쪽으로 제승정에 닿고 남으로는 갑곶진에 이르며 근처에 잡석이 많이 있다.) 고 했는데 그 정황이 이 사진과 일치한다.

 

 

위의 큰 사진과 비슷한 앵글을 잡기위해 필자가 강화대교 위에 가서 찍은 사진이다. 해안도로를 내기위해 염주돈 바로 아래 산자락을 상당 부분 잘라낸 것이 한 눈에 보여 옛 사진과 비교가 된다. 옛날에는 외성을 쌓아 적의 침입을 막고자 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철책이 쳐져있고 돈대 대신 해병대 초소가 있다.

 

염주돈 사진 언제 누가 찍었을까?

언제 누가 찍었는지 증빙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 없다.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을 암만 뒤져봐도 단서를 찾을 수가 없다. 다만 같은 시기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갑구지 일대의 사진이 몇 장 더 있는 것으로 봐서 19세기 후반 이 일대에 자리 잡았던 영국 성공회의 선교사들이나 조선수사해방학당(총제영 학당)에 초빙된 영국해군 교관 콜웰 대위 일행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앞으로 자료를 더 찾아보도록 하겠다. 아래 사진들을 한 번 보자?

 

 

이 사진들의 공통점은 시기적으로 19세기 말(1893년~1896년), 장소는 강화의 관문인 갑구지 일대, 촬영자 및 촬영 추정자는 조선수사해방학당의 영국 교관단과 영국 성공회 선교사들이다. 서두에 제시한 염주돈 사진이나 진해루 사진도 이때 이들이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이다.

 

현재의 염주돈(炎珠墩)

사람의 발길이 하도 뜸해, 있던 길도 사라진 만수산에 올라 숲속을 한참 헤멘 끝에 가까스로 염주돈을 찾았다. 넓적한 돌 하나가 여름 햇빛에 빛나고 있는 저 둔덕이 염주돈인데 그냥 흔적만 남아있다. 그 밑에 면석 몇개가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번 했을 정도로 망가진 상태이다. 옛날 사진과 비슷한 앵글로 사진을 찍어봤는데 4~50년 정도 자란 참나무류로 덮혀있어서 갑구지 바다와 건너편 문수산이 안보이니 분위기가 다르다. 필자가 60,70년대에 보았던 만수산도 옛날 사진과 별 차이 없는 민둥산이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서 찍었다. 사각형 돈대의 북서쪽 모서리 부분인데 면석 몇 개와 잡석들이 흙무더기에 파묻혀 있다. 100년이 조금 넘는 사이에 그 많던 성돌들이 거의 다 사라졌는데 돈대 주변이 워낙 급경사라 밑으로 다 굴러 떨어졌을까?

 

면석 하나가 제법 큰데 저걸 여기까지 옮겨와 쌓은 선조들의 노고가 피부로 느껴진다. 운반장비나 기계가 없던 시절이니 순전히 사람 힘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을 터, 당시 48개 돈대의 축조공사에 石手, 土手, 木手, 冶匠 등 기술자 2,000여 명에 전국 각지에서 동원한 승군(僧軍) 8,000명, 어영청 군사 4,262명이 투입되었다. 가진건 인력뿐이였으니 몸으로 때운 대공사였다. 일반인 기술자들에겐 품삯이 지불되었구요 승군과 어영군은 밥만 먹여줬다. 이끼가 퍼렇게 낀 저 돌들은 그 시대를 살아낸 민초들의 땀과 눈물과 혼이 스며있는 우리의 보물일 수밖에 없다.

 

 

돈대 앞쪽으로 가보니 잘린 산자락을 철조망으로 막아놨는데 그 사이에 염주돈 설명판이 뻘쭘하게 서있다. 만든지 얼마 되지않은듯 스테인리스 프레임이나 인쇄된 문안이 깨끗했다. 내용은 어느 돈대에서나 볼 수 있는 판에 박은 듯한 문장인데 눈에 띄는 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명칭이다. 이 돈대를 만든 우리 조상들은 한 번도 [염주돈대]라고 쓴 적이 없다. 항상 [염주돈]이라고 표기했다. 墩이나 臺나 같은 뜻의 글자이기 때문에 고유명으로 쓸 때는 언제나 '갑곶돈', '초지돈', '월곶돈' 이렇게 표기했다. 念珠墩의 念자도 처음 기획 단계에서부터 19세기 이전까지는 줄곧 불꽃炎자 '炎珠墩'으로 써왔는데 19세기 이후의 자료만 보고 오리지널 이름자를 특별한 이유없이 바꿔 버린 것이다.

 

둘째, 여기가 墩臺냐 墩臺址냐이다. 돈대가 다 허물어지고 면석만 몇 개 남아있으니 墩臺가 아니라 墩臺址여야 한다. 그래야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은 물론, 앞으로 언젠가 복원을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도 될 수 있다. 설명판 타이틀을 [염주돈지 炎珠墩址]라고 해야 맞다.

 

접근하기도 쉽지않고 볼 것도, 볼 사람도 없는 곳에 산뜻하게 설치된 설명판을 보고 참 뜬금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곧 생각을 바꿨다. "이 돈대는 반짝 반짝 빛나는 스테인리스 프레임의 광택이 사라지기 전에 복원을 하겠노라" 라는 암시로 받아들였다.

 

방방곡곡 뉴스, 김보형 기자(강화향토사학자) www.bbg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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