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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3/11/26  김보형
강화도, 갑곶돈(甲串墩)은 돈대(墩臺)가 아니다.

 

갑곶돈이 돈대가 아니라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놀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이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전적지 보수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복원된 갑곶돈은 40여 년 가까운 세월동안 전국의 수많은 관광객과 각지의 수많은 학생들이 역사체험, 현장학습 등의 이름으로 다녀간 강화도의 국방유적 중 첫번째 가는 코스가 아닌가!

 

 

이 사진이 널리 알려져 있고 우리 모두가 알고있는 사적 제306호 갑곶돈의 모습이다. 해안 돌출부에 벽돌로 쌓은 치첩(雉堞)이 사각형 모양으로 둘러처져 있고 그 앞에는 소포(小砲) 1문과 불랑기(佛狼機) 1문이 전시되어 있어 조선시대 돈대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듯 하다.

 

 

그러나 이곳은 돈대가 아니다. 현재 강화도에 있는 52개의 돈대 중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거나 복원을 잘 해놓은 돈대를 보면 알겠지만 이곳은 외형상으로도 돈대의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럼 이 곳은? 1691년(숙종17년)부터 조금씩 조금씩 쌓은 外城 줄기의 한 부분이다. 돌출된 바위 절벽을 성벽삼아 그 위에다 바로 치첩을 쌓은 이 직사각형 부분은 일반 성곽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치(雉)에 해당하는 곳이다.

 

* 치(雉) - 성벽에서 적이 접근하는 것을 일찍 관측하고,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정면이나 측면에서 격퇴할 수 있도록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돌출시켜 장방형 또는 반원형으로 덧붙혀서 만든 성곽 시설물 중의 하나이다. 통상 각(角)을 이루고 있는 것을 치성(雉城)이라 하고 둥근모양을 곡성(曲城)이라 한다.

 

 

이러한 치(雉)는 정족산성에서도 볼 수 있는데 19세기 강화도지도(8폭)를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전등사 출입구로 쓰는 동문의 오른쪽 봉우리가 망봉(望峰)인데 그 위에 직사각형의 치성(雉城)이 보인다. 강화부성 남문에서 서문쪽으로 조금 올라간 곳에는 곡성(曲城)도 있다.

 

 

앞에 큰사진과 동일한 장소를 바다쪽에서 찍은 이 사진은 강화外城 갑구지 부분의 마지막 실제 모습으로 1876년(고종13년) 초, 운양호 사건 이후 진행된 강화도 조일회담 때 일본 대표단 수행기자가 찍은 것이다.

 

항상 사진 제목이 갑곶돈대로 나오는 이 사진을 자세히 보면 두 명의 군사가 서 있는 치(雉) 부분이 곡형(曲形)을 이루고 있어 완전 직사각형으로 복원된 현재의 모습하고는 조금 차이가 있는 듯 하다. 왼쪽에는 동락천 물길의 종착지인 갯골이 보이고 그 위를 가로 지르는 성벽에는 석수문(石水門)이 설치되어 있다.

 

이 외성의 雉는 갑구지 앞바다가 한 눈에 보이는 좋은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 사진에서 보는 것 처럼 평소에는 갑곶돈의 전방 관측초소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외성줄기도 석수문도 없어진 갯골에는 막돌 허튼층 쌓기한 축대가 현대식 수문에서 쏟아내는 동락천의 끝물을 받아내고 있다. 이 일대에 민가가 제법 많이 있었던 필자의 어린 시절, 여름이면 갯골에서 멱 감고 갯뻘에서 뒹굴며 놀던 곳이라 옛 흑백사진을 볼 때마다 그리고 이 곳에 올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 50여 년 사이에 상전이 벽해된 느낌이다.

 

그럼 진짜 갑곶돈(甲串墩)의 존재와 그 위치는?

돈대 설치를 주관한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는 설치계획안을 한창 준비하던 1678년(숙종4년)에 49개의 돈대가 들어 설 장소를 직접 말을 타고 5일 동안 돌아봤다. 월곶돈부터 시작해서 270여 리의 강화도를 한바퀴 돌아보고 최종 입지를 선정했는데 그 보고서가 '강도설돈처소별단'(江都設墩處所別單)이다. 요즘식으로 바꿔보면 '강화도 돈대 설치장소에 대한 별첨 보고서' 쯤 되는데 여기에 기록된 갑곶돈 입지에 대한 언급을 살펴보자.

 

<第六甲串津. 前崖斗起,崖右小岡亦高,當因其地勢彎爲曲形,城子亦宜稍大,北距炎珠隅,南距加里山,運石頗遠> "여섯번째 장소 갑곶나루 - 앞에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있고 절벽 오른쪽에 있는 작은 능선 역시 높으니 그 지세에 따라 곡선으로 굽은 형태가 되겠고 돈대 성벽이 약간 클 수밖에 없겠습니다. 북쪽으로는 염주우에 닿고 남쪽으로는 가리산에 이르며 돌을 운반하기는 거리가 좀 멉니다." 이렇게 갑곶돈의 입지를 묘사해 놓았는데 이곳 지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정도로도 얼추 윤곽을 잡지만 조선시대 지도를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지도 맨왼쪽에 수문이 있고 바로 옆에 지금 갑곶돈 행세를 하고 있는 장방형의 치성(雉城)이 불쑥 튀어 나와 있다. 그 바로 옆 절벽 위에 甲串墩이라고 크게 써놓은 글씨와 함께 돈대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진짜 갑곶돈대이다. 현재 이 자리에는 구 강화대교가 걸쳐져 있다. 그 뒤에는 제물진이 빨간 테두리로 강조되어 있으며 갑곶돈이 있는 절벽을 옆으로 조금 내려가면 외성 문이 나오는데 바로 강화도의 관문 역할을 했던 진해루(鎭海樓)이다.

 

이 지도는 19세기 후반에 만든 강도부지도(서울대 도서관 소장)의 갑곶돈 일대를 확대한 모습이다. 채색 필사본으로 산, 하천, 도로, 성줄기와 돈대, 건물 등을 상세히 표현한 것이 위의 김석주 보고서 언급과 다를 바가 없고 실제 현지 모습과도 일치한다. 강화군에서 발간한《江華 옛 地圖》 46~47쪽에 수록되어 있다.

 

 

이 지도는 서울대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8폭 병풍으로 된 '강화도지도'인데 그 중 2번째 폭에 나오는 갑곶돈 일대를 확대한 사진이다. 왼쪽부터 석수문, 치성, 갑곶돈, 진해루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 앞에 지도와 똑같다. 갑곶돈을 받치고 있던 저 바위 절벽이 지금은 구 강화대교 西端을 교각처럼 떠받치고 있는 중이다.

 

이 지도에서 눈에 띄는 것은 치성 오른쪽에 지금은 없는(복원이 안된) 작은 문(亞門)이 하나 나있다. 이 문을 통해 진해루쪽으로 이동로가 연결되어 있는데 바닷가 갯벌과는 돌로 축대를 쌓아 경계를 지었다. 갑곶돈 내부에는 돈사(墩舍)가 한 채 있는 것이 보인다. 돈군(墩軍)들이 머물 수 있는 막사 또는 초소막같은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텐데 그동안 우리는 돈사가 있는 돈대를 본 적이 없다.

 

갑곶돈 뒷쪽에는 갑곶돈의 소속 부대인 제물진(濟物鎭)의 병영 일부가 보인다. 三門, 下人廳, 南庫, 鎭舍 등의 배치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되겠다. 이곳은 현재 천주교 순교성지가 들어서 있는 진해마을 일대이다. 진해루 앞쪽 갑구지 나루터에 선착장 석축로가 길게 깔려 있는 것까지 자세하게 그려놓은 이 병풍지도는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江華 옛 地圖》53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36쪽에 있는 철종의 '강화행렬도'에도 갑곶돈의 모습이 자세히 나와 있다.

 

19세기 末에 촬영된 <갑곶돈> 사진 발견

 

 

이 사진은 영국 성공회의 선교 초기, 갑구지 성당의 모습으로 널리 알려진 것인데 바로 이웃에 있던 조선수사해방학당(총제영 학당)의 교관인 영국 해군 예비역 대위 콜웰이 1894년 무렵 촬영한 것으로 추정한다. 예배당과 진료소,유치원 등 3동의 초가집으로 이루어진 이곳에서 총제영학당의 생도들이 서양문물 교육과 영어교육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진에는 촬영자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피사체가 하나 함께 찍혀 있는데 그 피사체는 놀랍게도 무너지기 전의 <갑곶돈> 마지막 모습이다.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숨은 그림처럼 수많은 관찰자들의 시선을 피해 있다가 이제야 홀연히 그 자태를 드러낸 갑곶돈 치첩(여장)은 다 무너지고 없지만 성벽에 나있는 포혈(砲穴) 두 개가 뚜렸한, 전형적인 돈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강도설돈처소별단'(江都設墩處所別單)에도 언급되어 있고 조선시대 지도에도 그려져 있는 그 절벽 위에, 흐릿하지만 돈대 의 성벽이 우뚝 서있는 것이 보인다. 현재 구 강화대교가 시작되는 지점에 존재했던 진짜 갑곶돈이다.

 

숙종 4년(1678) 11월 4일 김석주가 올린 江都墩臺設築節目 (강화 돈대 설치 시행지침)의 후록(後錄)에 보면 돈대의 형태와 규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돈대의 수를 49개소로 정하고 돈대의 제도는 산이 있는 곳은 산을 따라 성첩(城堞)을 만들며, 평지에 성을 쌓는 경우에 있어서는 그 높이를 3장(丈)으로 하고, 그 두께의 밑넓이는 3장 5척으로 하며, 면(面)의 넓이를 2장 5척으로 한다. 치첩은 높이 6척, 두께 3척, 길이 9척으로 하고 전면에 포혈(砲穴) 2개소, 좌우에 포혈 각 1개소로 하고, 주위를 4면 10칸(間) 기준으로 하되 그 지형에 따라 방형(方形) 또는 원형, 일직선 또는 ㄷ 자형으로 하며 파수병이 많아야 할 긴요한 지역의 경우는 성의 제도를 알맞게 크게 한다.>

 

돈대가 일반 성곽과 구분되는 요소 중의 하나가 바로 성벽에 포혈(砲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작은 사진은 후애돈(後崖墩)인데 성벽에 포혈(砲穴)을 내고 그 위에 총안(銃眼)을 낸 치첩(여장)을 덧쌓았다.

 

왜 치성(雉城)을 돈대(墩臺)로 둔갑시켰을까?

 

 

갑곶돈이 있던 자리에 와봤다. 1997년 新 강화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27년 동안 강화도를 육지와 연결시켜줬던 舊 강화대교의 시작점 바로 이 곳인데 다리는 철망으로 된 문으로 굳게 잠겨있었다. 사람과 차량의 통행이 끊긴 다리 위에는 커다란 송수관 한 쌍이 나란히 지나갈 뿐, 옛 영화를 알 리 없는 무심한 잡초들만 아스팔트 틈바구니까지 비집고 나와 무성하다.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는 강화도민의 오랜 숙원이었다. 1948년 철교가설기성회를 조직하면서 시작된 連陸의 꿈이 1965년 현대건설의 공사 시작으로 이루워져 가고 있었다. 강화대교를 설계하면서 다리가 놓여 질 최적의 입지조건을 찾다보니 갑곶돈이 있던 이 자리가 당연히 1순위가 되었을 것이다.

 

300여 년 전 병조판서 김석주의 판단이나 현대 토목 설계사의 안목이 일치할 수 밖에 없는 좋은 자리임이 분명하다. 이 때 갑곶돈은 이미 무너져 없어진지 오래 된 시점이었으니 설령 갑곶돈의 흔적이 남아있었거나 갑곶墩址임을 알고 있었다 한들 당시 연륙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1970년 1월 2일 마침내 대교가 완성되고 준공식이 거창하게 거행됐다. 이 날 필자도 수많은 인파들과 함께 다리를 건너는 개통식에 참가했었다.

 

문제는 몇 년 후에 발생하게 된다. 70년대 중반, 전적지 보수 정화사업이 제4공화국 문화정책의 핵심 기조로 내걸리면서 갑곶돈도 복원 대상이 되자 관계자들은 무척 당황스럽고 난감한 상황에 놓였을 것이다. 돈대를 복원해야 할 자리에는 몇 년 전에 완공한 大橋가 떡하니 놓여있었으니 말이다.

 

거기다 대통령까지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사안이니 모두들 묘안이 없을까 전전긍긍하다가 결국은 누군가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치성 부분을 복원하고 이걸 갑곶돈으로 둔갑시키자고 물론 필자의 추측이지만 이 상황은 뭐 거의 외길 수순이 아니겠나 싶다. 지금이라도 당시 관련자의 양심적 증언이 있었으면 좋겠다.

 

가짜 갑곶돈, 이것을 어찌 해야하나?

갑곶돈이 가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복원 당시 관계자들을 비롯해 꽤 많을 걸로 생각된다. 치성(雉城)부분, 다시 말해서 지금 갑곶돈 행세를 하고 있는 부분을 제 위치에 제대로 복원했다는 것은 진짜 갑곶돈의 존재와 위치를 잘 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서 무슨 조사 보고서의 조사의견으로 나왔었다는 얘기도 있고 어떤 학자는 '갑곶돈대의 원형'이라면서 이 글에서도 인용한 조선시대 지도 사진들을 제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한 경우는 아직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엄청난 역사왜곡이고 그 파장이 만만치 않을 사안이다. 그렇지만 더 시간이 흘러가기 전에,이제는 밝히고 해결 방향을 찾아야 한다. 필자의 제안은 3가지이다.

 

1. 강화군은 이실직고해야 한다. 조상들이 잘 만들었던 돈대와 외성을 우리가 잘못 복원하고 왜곡시켜서 후손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 아무리 오랫동안 관행처럼 여겨 온 일이라도 잘못을 인지했다면 정면돌파만큼 확실한 해결책은 없다. 파장이 두려워 역사왜곡을 묵인해서는 안된다.

 

2. 제대로 검증하지도 않고 사적 지정(1984년 8월 10일)을 해준 문화재청의 책임도 크다. 외성도 돈대만큼 중요한 문화유산이자 국방유적이니만큼 사적 제306호의 대상을 외성으로 변경하여 그 명칭을 강화외성 갑곶치성 구간(江華外城 甲串雉城 區間)으로 한다.

 

3. 舊 강화대교는 언젠가 철거될 것이다. 그때까지 갑곶돈지(구 강화대교 서단)에다 <갑비고차 역사전시관>을 만들어 갑곶나루, 갑창성(甲倉城), 강화외성, 진해루, 총제영학당 등 이 일대 유적에 대한 역사자료를 한데 모아 전시하고 갑곶돈은 그간의 내력과 함께 복원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여 여기에 게시한다.

 

차제에 12鎭堡 52墩臺에 대한 세밀한 연구와 사적 지정된 유적을 중심으로 전반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방방곡곡 뉴스 김보형 기자 www.bbggnews.com

강화군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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