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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2/02/05  김보형
강화에서 만든 팔만대장경을 몽땅 빼앗기게 생겼다!






문화재청이 문화재청 발족 50주년과 초조 대장경 판각이 시작된지 천 년을 기념하기 위해 2011년 11월15일 부터 12월18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천 년의 기록, 내일을 열다"란 주제로 특별 전시회를 개최했다.

천 년을 이어온 우리의 우수한 기록문화유산이자 귀중한 불교문화 유산인 초조 대장경과 재조 대장경 중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대장경이 대거 출품되어 국가 문화재로 지정된 대장경을 한자리에서 살필 수 있는 자리였으며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한역 대장경인 초조 대장경의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우리 기록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자 마련된 전시회였다.

필자는 전시회 폐회가 임박한 12월 15일에야 부랴부랴  이 위대한 조상들의 업적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는데   재조 대장경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커다란 문제가 발생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보통 팔만대장경으로 지칭하는 재조 대장경은 몽고의 침략을 불력으로 막기 위해 1236년부터 피난 수도 강화에서 판각되었다는 것은 각종 사서는 물론 교과서에도 기술되어 있는 너무도 당연한, 상식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대장경판이 간행된 곳을  지도로 그려서 표기해 놓은 것을 보면  재조대장경은 남해에서만 만들어진 것으로 강조해 놨고  당시 수도였던 강화는 아예 지도에 그려 넣지도 않았다.






전시장 한 쪽에 붙어있는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 설명판이다. 빨간 줄로 밑줄친 부분을 보면 "고려국 분사 남해대장도감에서 판각하였다고 한다"고 써 놓았다. 팔만대장경의 판각지를 완전히 남해도로 빼돌리기 위한 의도적인 기술이다.

 

당시 고려국의 황제 고종과 최고 실권자 최우가 머물고 있던 수도이며 대장도감과 판당(板堂)이 있었던 강화(당시 江都)에 대한 언급은 단 한군데도 없다.

팔만대장경 판각지에서 강화를 배제하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 누군가 역사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쿠데타의 주모자가 누군지 찾아 보았다.




위의 조선닷컴 기사에서 보듯이 한국문화유산연구원 박상국 원장이란 사람이 한 10여 년 전부터  "팔만대장경은 남해에서 판각됐다"는 해괴한 주장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사람은 불교서지학자임을 자처하는 사람으로 문화재청에서 정년퇴임하고 그 산하기관인 한국문화유산연구원에 원장으로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문화재청 주관의 초조대장경 전시회에서 재조대장경의 판각지가 남해라는 주장을 전시 문안에  삽입하는데 간여했으리라고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역시나 이 전시 특별강연에서도 이같은 주장을 반복한다.

그가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실장으로 있던 2001년 12월, 인천시 문화재위원회가 주관하고  새얼문화재단에서 진행한 "고려 팔만대장경과 강화도"란 학술 심포지움에 참가하여  "해인사 고려대장경 간행과 판각장소"란 주제로 발표할 때 부터 역사학자나 불교 서지학자들의 이의제기와 질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강화도 선원사에 대장도감(大藏都監)이 설치돼 판각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판각 장소는 경남 남해"라는 주장을  줄기차게 해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사람은 남해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 인사가 되었고 2011년만 해도 두 번이나 남해를 방문하여 이와 관련된 강연을 하였으며 「고려대장경 판각성지의 재조명」이란 타이틀의 학술대회에서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이란 주제발표를 통해 해인사 고려대장경은 100% 남해에서 판각됐다는 주장으로 왜곡에 마침표를 찍으려 하고 있다.

 

관련 학계에서는 자기 현시욕에 사로잡힌 돈키호테쯤으로 치부하고 눈길도 주지 않는 사이 문화재청을 뒷배로 한 한국문화유산연구원 원장이란 위치를 활용해 이 쿠데타를 거의 성공시켜 가고 있다. 강화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대응을 해야할 때가 되었다. 

박상국 원장이 제시한  남해판각의 근거 6가지를 살펴보면 불교 서지학자라는 사람이 황당한 소설을 쓰고 있는데 일단 일반인인 필자의 시각으로 반박하므로써 허무맹랑한 주장임을 만천하에 고하여 박상국 원장의 곡학아세를 질타하고자 한다.


박상국 원장은 남해판각의 근거로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남해타임즈 2011년 10월5일자 기사 인용
http://www.nh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916)

 

첫째, 당시 고려국의 수도였던 강화도는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대장도감은 설치했지만 대장경을 판각할 만큼 여건이 갖춰져 있지 못했다. (반박==> 아무리 전시지만,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수도만큼 모든 여건이 잘 갖춰진 곳이 어디에 또 있을까? 권력이 있는 곳에 인재와 재물이 있게 마련이다. 강화에 대장도감은 설치했지만 대장경을 판각할 만큼 여건이 갖춰져 있지 못했다는 얘기는 박상국의 3류소설의 시작일 뿐이다!!)

 

둘째, 대장도감을 두었다고 알려진 선원사는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원찰로서 이 절이 만들어진 시기가 1245년이며 이때는 이미 대장경 판각이 90% 이상 완료된 시점이어서 대장경 판각하고는 전혀 무관하다. ( 이건 맞는 얘기==>선원사는 대장경 판각장소가 아닌 보관장소이다. 판각성지로 홍보하고 있는 선원사에 문제있지만 이 역시 남해판각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판각은 궁성(내성) 서문밖에 위치한 판당(板堂)에서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국가기관인 대장도감을 자꾸 선원사에 두었다고 하는데 이건 중들이 만들어낸 얘기..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를 현대그룹에 두고 88올림픽을 치뤘다고 하는 얘기와 같다. ) 

 

셋째, 남해는 지리산 등지에서 판각재를 운반하기 쉬운 장소이며 기마민족인 몽골군이 물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침략이 어려운 섬이라는 이점이 있다. (반박==>江華도 섬이라는 사실을 박상국씨가 깜빡 했는가 보다. 내가 대장도감의 都監이라도 경판 자재를 쉽게 조달하기 위해 남해에다 대장도감 분사(分司)를 설치하고 지점장을 파견했을 것이다.)

 

넷째, 가장 중요한 단서는 판각이 가장 왕성하게 이루어진 1243년부터 1247년까지 5년간 경판을 새긴 각수를 조사해 본 결과 동일한 각수가 많게는 69명이 대장도감판도 새기고 분사대장도감판도 새겼음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같은 장소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해인사 대장경판전에 있는 「종경록」은 1246년에서 1248년에 추가로 판각된 것인데 모두가 분사대장도감판이다.

 

종경록」 권 27에 ‘분사남해대장도감’이란 간기가 새겨져 있는데, 그동안 추정해왔던 대장경판 판각장소가 남해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더구나 「종경록」을 판각한 ‘최동’이란 각수가 1244년 분사대장도감판의 판각뿐만 아니라 대장도감판의 판각에도 참여한 각수임이 확인됐다. 이러한 기록으로 대장경판이 모두 남해에서 판각됐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가 있었다.

(반박==> 刻手 한 사람이 강화와 남해를 왔다갔다 하면서 양쪽 판에 판각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도저히 불가능하지 않다.

 

강화와 남해는 당시 뱃길로 2~3일 거리이고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항상 왕래하고 있었으며 경판 재료나 장경 원고,완성된 경판 등이 수시로 왔다갔다 했을 터인데 이게 왜 불가능하다고 하는지 이해 불가하다! 현대인의 라이프사이클로 이해하려 하면 그리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고려시대 우리 조상들의 능력을 폄훼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경판 변계선 내외에 새겨넣은 사인(Sign)이 각수의 것인지 시주자의 것인지 부터 더 연구를 해야한다. 각수의 이름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이 사인이 시주자의 것이라면 얘기가 또 달라질 것이고 박상국같은 사람의 엉뚱한 상상도 사라질 것이다. 불사 건축시 기왓장에 기와쟁이(瓦匠) 이름을 써 넣는지 시주자의 이름을 써 넣는지도 좀 알아보시고...)



다섯째,
고려사 열전 최이편에 ‘도감을 따로 세워 사재로 새긴 판이 거의 반이나 돼’라고 돼 있고, 고려사 열전 정안편에는 ‘남해에 퇴거해 부처님을 좋아하며 명산승찰을 편린하고 사재를 희사해 국가와 약속하고 대장경의 반 정도를 간행했다’고 돼 있다.

 

강화정부는 대장경을 판각할 여력이 없었고 최이, 즉 최우가 대장경 판각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으며 전반부에 반정도를 판각했을 것으로 보인다.정안은 최우의 처남인데 국자제주란 벼슬을 그만두고 1241년 이후에 남해로 내려가 대장경 판각의 경비를 부담하고 후반부를 맡아 본격적으로 이 사업을 주관하여 판각을 완료한 것이다.

 (반박==>위와 같은 얘기를 하면서 어떻게 100% 남해판각이란 주장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박상국씨는 산수도 못하는가? 이미 사계 권위자나 선학들도 팔만대장경의 1/3은 대장도감 강화本司에서, 2/3는 대장도감 남해分司에서 조성(彫成)했다는 연구결과를 내고 정설로 인정하고 있는데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

 

여섯째, 분사대장도감에 ‘수기서’라는 간기가 새겨져 있는데 이 교정기록은 수기대사가 강화도 대장도감이 아닌 분사남해대장도감에서 진두지휘를 하며 대장경 내용을 교감하고 판각작업을 주관했다는 증거가 된다.

박원장은 또한 분사도감이 여러곳에 분산돼 있을 것이라는 설도 근거가 없을뿐더러 가능성이 없는 가설에 불과하다고 했다.

(반박==>기사의 "분사대장도감에 ‘수기서’라는 간기" 이 부분은 남해타임즈 기자가 잘못 베낀 것 같다."‘수기서’에 분사대장도감이라는 간기"가 맞을 듯...수기대사는 대장경 원고를 총괄한 분으로 알려졌다. 그 많은 경전의 원고를 모우고 편집하고, 교정까지 보느라 제일 바쁜 자리였을 것이다.

 

완성된 원고를 강화본사에 넘기느냐 남해분사로 보내느냐는 당시의 제작상황에 맞춰 결정했을 것이고 남해행이 결정된 경우, 수시로 오가던 선편으로 원고를 보냈을 것이다.  

 

제작 총괄은 강화에 있는 정부기관인 대장도감의 長이 했을 것이고 원고제작과 교정을 충남 개태사의 주지 수기대사에게 용역 발주한 것인데  박상국 소설에서는 용역 수주자인 수기대사를 주인공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을 제껴놓고, 잠실 주경기장을 건설한 대림산업 사장이 88올림픽을 치뤄낸 거라고 소설을 쓸 참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이게 무슨 100%남해판각의 근거란 말인가?)

박상국의 왜곡소설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나기보단 짜증이
난다. 근거답지 않은 근거, 근거같지 않은 근거를 대하자니 답답하다. 일반인이 보아 이 정도이니 전문가들은 어떻겠는가..입을 꾹 닫고 무대응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러나 이를 오랬동안 방치할 경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이 邪說,妖說이 정설이 될 우려가 있다. 이에 경종을 울려 관계자들의 행동을 촉구하고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음모가 진행중인 사실 조차도 모르고 있는 일반인들 특히 강화사람들에게 이를 알리고자 한다.

 
방방곡곡  김보형 기자 http://bbg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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